[동아광장/신인석]대선주자, 경제정책의 내용 밝히라

  • 입력 2007년 2월 14일 02시 58분


바야흐로 ‘중도’의 시대다.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주자들은 모두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중도라고 정의한다. 열린우리당의 잔류파나 탈당파나 모두 “제대로 된 중도통합이 목표”라고 한다. 누가 집권하든 “경제정책에 차이가 있겠느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그래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사에는 한때 정파 간 경제정책 차이가 흑백을 보는 것과 같았던 때가 있었다. 1931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허버트 클라크 후버와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실업보험의 도입을 놓고 격돌했다. 실업률이 25%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도입을 주장한 루스벨트가 승리했고, 이른바 ‘뉴딜 정책’이 시작된다. 1946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은 전력산업, 석탄산업 등 기간산업을 전면 국유화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유명한 ‘예종으로의 길’을 출간하는 등 우익 세력이 강력히 반대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경제정책은 수렴현상을 보인다. 우파 정권은 사회보장제도에 반대하지 않고, 좌파 정권은 국유화, 금융통제 등 사회주의적 경제운영을 주장하지 않는다. 루스벨트가 살아 돌아와 현재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를 본다면 노령연금, 의료보험 등으로 엄청나게 비대해진 모습에 할 말을 잃을지 모른다. 그러나 1980년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내건 로널드 레이건 정권도 실업보험은 물론이고, 공적 연금과 의료보험 등의 폐지를 말하지는 않았다. 반세기가 지나면서 어느 정도의 사회보장제도가 살 만한 사회의 조건이라는 점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개 기업도 대차대조표 있는데

국유화됐던 영국의 기간산업은 1980년대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정권이 등장하며 모두 민영화된다. 그렇지만 ‘제3의 길’을 주창하며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1990년대 재집권하였을 때 노동당은 더는 국유화를 거론하지 않았다. 국영 독점기업의 방만함과 일상적 파업에 영국 국민이 진저리를 냈기 때문이다.

이제 선진국에서 개방된 시장경제 체제만이 경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동시에 일정 수준의 사회복지제도는 필요하다는 점 등을 부정하는 정치세력은 없다. 20세기 초반의 경제정책 대립을 기준으로 본다면 중도는 세계사가 도달한 합의점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유력 정치인들이 이를 표방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경제정책은 누가 집권하든 차이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유권자인 국민이 더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영역인가. 그렇지 않다. 사라진 것은 경제정책을 둘러싼 원론 수준에서의 이데올로기 대립일 뿐이다. 그 자체로 중요한 성과이지만, 각론의 구체적인 경제정책의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원론보다는 각론이 어려운 법이다.

제대로 된 세부 경제정책을 내놓는 것이 어려운 탓에 정치권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가 나타나곤 한다. 어려운 현안을 겨냥한 경제정책 개발은 꺼려진다. 그 대신 이미지 경쟁이 추구되고 그에 걸맞은 인기영합 정책만이 공약된다. ‘진보’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정파는 복지 프로그램의 공약에는 열심이지만 재원 조달 방법은 말하지 않는다. ‘보수’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정파는 세금 부담 경감을 약속하지만, 줄어드는 재정수입에 맞추어 어떤 복지 프로그램을 정리할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는다.

이제 모든 후보가 성장잠재력 제고를 약속할 것이고, 어떤 후보는 구체적인 성장률 수치를 공약할 것이다. 성장률을 말하는 후보가 있다면, 국민은 그 달성 계획의 내용과 5년간의 성장 전망표를 요구해야 한다. 지난 대선처럼 막연히 “7% 성장률을 약속해서 재미 좀 보았다”는 당선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라 운명 주먹구구 결정 안 돼

새로운 복지제도를 약속하는 후보도 있을 것이고 대규모 개발정책을 내세우는 후보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국민은 이미 파탄이 예정되어 있는 각종 연금제도의 개혁 방안부터 추궁하여야 한다. 새로운 재정지출 계획에 대한 재원의 조달 계획도 물어야 한다. 모든 후보에게 향후 5년 및 그 후의 재정 전망표와 국가부채 전망표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한다.

일개 기업의 사장을 선임하는 주주총회에서도 대차대조표와 구체적인 성장계획 설명이 요구된다. 5년간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일이다. 언제까지나 주먹구구로 넘어갈 수는 없다.

신인석 객원논설위원·중앙대 교수 ishin@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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