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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9일 19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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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조선처럼 오랫동안 쇄국을 고집했다. 하지만 숨구멍 하나는 열어뒀다.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라는 조그만 인공섬이었다. 도쿠가와 막부(幕府)는 페리 제독에게 굴복하기 전까지 무려 200년 동안 네덜란드인들에게 이 섬에 거주하며 일본과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다. 기독교만 빼고 세계지리와 의학서적부터 대포, 망원경까지 서양의 많은 문물이 이 경로로 일본에 들어갔다. 난학(蘭學) 즉 화란어로 된 학문의 전성시대였다.
▷메이지시대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일본의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도 처음엔 난학 신봉자였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서양 상인들이 화란어가 아니라 영어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영학(英學)으로 옮아간다. 이어 게이오대학을 설립하고,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구미 열강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한다. ‘탈아입구’는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미국 워싱턴은 15일에 있을 네덜란드 출신 일본군 위안부 얀 뤼프 오헤르너(84) 할머니의 의회 청문회 증언을 앞두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위안부 하면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떠올리지만, 오헤르너 할머니처럼 태평양전쟁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살다가 끌려가 위안부가 된 네덜란드 여성도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난학’으로 눈을 떠 ‘탈아입구’를 외치며 전쟁까지 일으켰던 일본인들이 오헤르너 할머니의 증언을 듣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자.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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