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50 즈음에

  • 입력 2007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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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10대에는 시간이 시속 10km로 천천히 가는 것 같다가, 20대엔 시속 20km쯤 되어 조금 빨리 달리는 듯하고, 30대에는 30km, 40대에는 40km로 점점 빨라진다. 그런데 50대가 아주 묘한 나이다. 갑자기 속도가 뚝 떨어지면서 주행선 밖으로 벗어나는 것 같다. 60대 이후에는 서행하거나 아예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고 한다.

전반 동네축구, 후반 NBA 하라니

물론 여기에도 상대성원리가 적용된다. 시인 김달진(1907∼1989)은 “60에는 해(年)마다 늙고, 70에는 달(月)마다 늙고, 80에는 날(日)마다 늙고, 90에는 때(時)마다 늙고, 100세에는 분(分)마다 늙는다”며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나이 50을 조금 넘긴 주제에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고 얘기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하지만 요즘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대개 그런 소리를 한다. 어쩌다 동창 모임에 가 보면 번듯한 직장이 있는 친구보다는 이런저런 일로 소일하며 지내는 친구가 더 많아졌다. 정년을 마친 이는 ‘호상(好喪)’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한국 프로야구 OB 베어스의 원년(元年) 우승을 이끌었던 불사조 투수 박철순(51)이 대장암으로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한다는 소식 또한 우리 세대 전체의 아픔처럼 받아들여진다. 인생 전반전에는 ‘동네 축구’를 했는데 후반전 들어 갑자기 ‘미국프로농구(NBA)’를 하라고 강요당하는 것이 이 시대 50대 가장의 슬픈 초상(肖像)인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할 곳이 없어진 실직자들은 차츰 아내와 자녀에게서도 외면과 지탄을 받게 된다.

오래 등산을 즐긴 선배는 “요즘 서울 근교 평일 등산객이 1970년대 초 주말 등산객보다 많은 것 같다”며 “서울에 북한산 청계산 관악산 등이 없었더라면 저 많은 실직자가 다 어디로 가겠느냐”고 말하곤 한다. 그나마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산이라도 탈 수 있으면 다행이다. ‘접대 골프’를 많이 친 한 선배는 퇴직 후 친구와 후배들에게 신세 지기 싫다며 그 좋아하던 골프를 50대 들어 눈 딱 감고 그만뒀다.

어떤 선배는 아예 은둔하다시피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낸다. 형편을 아는 이들은 “말씀은 안 하지만 체면치레와 관혼상제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고 전한다. 잘나가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아예 부부가 외국에 나가 몇 년씩 지내다 오곤 한다. 이런저런 자리에 의무적으로 얼굴을 비치지 않아도 되고, 교포가 많이 사는 곳에 가면 말도 잘 통하고 생활비도 국내보다 적게 든다고 한다. 이래저래 요즘은 집안에 관혼상제가 생길 때면 찾아와 주신 이들보다 오실 만한 분인데 오시지 못한 분들의 안부와 처지를 더 걱정하게 된다.

인생 결승골은 후반에 터진다

인터넷에는 요즘 이런 우스갯소리도 돌아다닌다. ‘남자가 50이 넘으면 꼭 필요한 것’은 健(건·건강) 妻(처·아내) 財(재·재산) 事(사·취미) 友(우·친구) 순이다. ‘여자가 50이 넘으면 필요한 것’은 사뭇 다르다. 財 友 健 犬(견·애견) 夫(부·남편) 순이다. 남녀의 차이가 큰 것은 요즘은 직장에 매여 있는 남편보다 중년 주부들의 대외 활동이 활발하고 종교 활동과 자녀 교육 등을 통한 사회적 네트워크 또한 넓고 깊기 때문이다.

자녀가 순위에 빠져 있는 점 또한 특이하지만 어차피 돈이 있어야 자식들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이전에는 ‘노후 대비’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정년까지 열심히 일한 뒤 자식들 봉양을 받으며 퇴직금 이자만으로도 그럭저럭 노후를 보낼 만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축구 경기에 비교한 인생이다. 25세까지는 연습기간, 50세까지는 전반전, 75세까지는 후반전, 100세까지는 연장전이라고 한다. ‘인생의 결승골’은 후반전이나 연장전에 터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또다시 기대를 걸고 한 해를 보내자.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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