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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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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과 마음은 남을 따라가는 속성이 있다. 좌중에서 누가 하품을 하면 곧 따라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누가 헛기침을 시작하면 이내 수다한 헛기침이 뒤따른다. 누가 험담을 시작하면 너도나도 따라 해서 한마디씩 첨가한다.
그래서 유행 현상이 생기지만 우리의 생체 구조가 원래 그렇게 돼 있다고 말하는 생리학자가 있다. 집단생활을 하는 여성의 생리 현상이 동일한 날짜로 수렴되는 현상을 그런 사례로 들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말한 유명한 예술 감염설의 뼈대가 되는 감정의 전염성도 인체의 본원적인 다수 추수 성향에 기초해 있다는 설명이다. 독불장군 노릇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올해 여기저기서 사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대인이나 군인 비하 발언을 한 인사부터 어두운 과거를 가진 인사에 이르기까지 사과 주체는 다양하나 모두 유명 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옛 문헌을 인용하며 이슬람교를 비판했던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반발이 일자 “인용 구절은 나 개인의 의견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고 간접적으로 사과했다.
이에 고무된 탓인지 사과의 목소리가 잇따라 이어졌다. 한 외신은 ‘올해는 사과의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의 경우이고 우리 얘기는 아니다.
진정성을 지닌 사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사과나 사죄는 면책을 위한 임시방편이나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요식 행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과랍시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사과 대상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먼 산을 바라보는 자세는 사과라기보다 새로운 도전이요 모욕이요 해코지다.
사실 희한한 대국민 사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임명한 각료 앞이나 추종자 모임에서 여차여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유감이라고 말하고 나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고 홍보한다. 이것은 비난 회피용 홍보이지 사과가 아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말인데 유감 표명은 어디까지나 유감 표명일 뿐 사과는 아니다.
인본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얼치기 사회다윈주의자 히틀러는 ‘양심은 유대인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며 정의와 양심을 비웃었다. 조직폭력배나 범죄적 직업인의 발상이다. 이러한 발상에 공공연히 동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심 그를 숭배하고 추종하는 히틀러 흐름의 냉소주의자가 세상에는 많은 것 같다. 특히 정치인 사이에서 그런 것 같다. 양심이나 정의를 믿지 않는 이들은 따라서 진정한 사과를 할 줄 모른다. 양심이나 정의의 전략적 표방과 활용이 있을 뿐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격심한 갈등과 적대감으로 차 있다. 국민 사이에서 떠도는 우스갯소리나 뒷골목의 한담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안온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사회를 채운 적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요즘의 살벌한 사회 갈등과 적대감은 평균 수준을 사뭇 웃돈다. 세모를 맞이하여 우리 사회에서 사과의 문화가 퍼져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요란한 빈 수레 소리와 국정 혼란과 북핵 문제에 대한 부적절한 대처로 국민을 피로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 정권 담당자들이 우선 사과 주체가 돼야 한다. 이런 지적이 한낱 편향된 반대자의 소리가 아니라는 점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친 지지율이 뒷받침해 줄 것이다.
물론 ‘잘못을 저질러 놓고 사과만 하면 그만이냐’ 하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과오의 시인과 사과는 올바른 행보를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국민으로서는 기연가미연가하다고 여기면서도 사과를 수용하고 용서하고 싶은 심정이 될 것이다.
‘용서할 수는 있되 잊을 수는 없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사실은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요 용서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용서할 수 없다고 버티기가 야박해서 둘러대는 배수진이다.
우리가 용서를 하는 이유는 심성이 고와서도 아니고 관대해서도 아니다. 용서하지 않고 분노하는 일은 매우 소모적이다. 증오와 분노는 우리의 기운을 앗아 가고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 우리가 용서해야 그나마 기력과 희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열광적 집단주의가 판치는 사회라 지도층의 사과는 하품이 하품을 낳듯이 수많은 사과를 낳을 것이 아닌가? 헛기침이 헛기침을 낳듯이 용서를 낳을 것이 아닌가? 그래야 또 얼마쯤 희망 있고 훈훈한 새해가 될 것이 아닌가?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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