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권순택]‘짝퉁’ 청문회 ‘명품’ 만들려면

  • 입력 2006년 2월 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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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화위지(橘化爲枳). 중국 춘추시대 고사에서 유래한 이 말은 회남(淮南)의 귤을 회수(淮水)를 건너 회북(淮北)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하듯 사람도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뜻이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디 사람뿐일까. 법과 제도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2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국의 인사청문회 제도가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간 뒤 ‘탱자처럼’ 변한 것도 그런 사례이다.

미국의 상원 인사청문회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살린 것으로 대통령의 인사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다. 인사청문회 대상은 차관보급 이상의 행정부 고위 공직자를 포함한 600여 명이나 되며 상원 의원 100명 가운데 과반수가 동의해야만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비리나 심각한 도덕성 문제가 드러나 청문회에 나가지도 못하고 물러난 사람이 허다하다. 청문회는 거쳤지만 상원 의원 절반의 동의를 얻지 못해 임명되지 못한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는 2000년 6월 인사청문회법이 제정된 뒤 두 차례 개정을 통해 청문회 대상이 국무총리와 장관을 포함한 58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국회가 과반수의 의사로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대상은 23명에 불과하다. 이른바 ‘빅4’라는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과 장관들이 임명 거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미국 제도와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다.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대통령이지만 ‘인사권은 고유 권한’이라는 논리 때문에 ‘짝퉁’ 인사청문회가 된 것이다.

상원 의원 과반수의 동의가 임명의 필수조건인 미국에서는 후보 지명이 그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친 후보도 청문회를 거치며 문제가 드러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직무와 관련된 비리나 문제가 드러나면 자진 사퇴하거나 상원 인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조 베어드 법무장관 내정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명한 린다 차베스 노동장관 내정자와 버나드 케릭 국토안보장관 내정자가 그런 사례이다.

모두 불법 이민자를 가정부나 보모로 고용한 것이 문제였다. 연방 판사의 경우 이념 문제로 인준을 통과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미국에 있는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상원 의원 100명 중 60명이 동의할 때까지 표결을 지연시킬 수 있는 필리버스터(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제도다.

다수의 횡포를 막고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제도는 다수결의 진정한 의미를 살린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소수 야당이 명분도 없이 필리버스터를 남발할 수는 없다. 여론이 외면하는 데다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상원 의원이 55명이나 되지만 이 제도 때문에 인사청문회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다. 야당 의원 5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만 표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6∼8일 인사청문회를 거친 6명처럼 온갖 문제가 상원 청문회에서 나왔다면 대부분 표결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인사청문회에 대한 국회의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하지만 대통령이 그 의견을 따를 의무가, 적어도 법적으로는 없다.

현 정부는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청와대 검증을 통해 190명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고 자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불이익을 받은 190명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청문회 대상자들의 임명과 관련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한국적 현실을 고려한 ‘짝퉁’ 청문회이지만 ‘명품’ 못지않은 청문회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제 노 대통령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권순택 워싱턴 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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