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17>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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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오래잖아 함성과 함께 형양성 성벽 한 모퉁이가 초나라 군사들로 덮였다. 성벽 아래서 그걸 본 초나라 군사들이 더욱 기세가 올라 다투어 성벽 위로 기어올랐다. 하지만 아직 성이 떨어지기는 일렀다.

일이 다급해지자 성벽 위의 한군(漢軍)도 그 마지막 힘을 짜냈다. 저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쳐나와 어렵게 성벽을 기어오른 초나라 군사들을 밀어붙이자 이내 전세가 뒤집혔다. 초나라 군사들로 뒤덮였던 성벽 모퉁이를 다시 차지한 한군들이 보란 듯 붉은 기치를 내걸었다.

다른 쪽 성벽을 기어오르던 초나라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때의 기세로 구름사다리를 기어오르고 밧줄을 탔으나 성벽 위로 오른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들마저 한군들의 반격으로 하나 둘 구슬픈 비명과 함께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초나라 군사들의 기세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이만하면 됐다. 모두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라. 성은 나중에 다시 쳐도 늦지 않다.”

패왕이 그렇게 말하며 공성을 멈추게 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머지않은 승리를 예감한 것인지 군사를 물리면서도 별로 마음 상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패왕의 예감이 맞아떨어질 때까지 초나라 군사들은 그날만도 두 차례의 모진 패퇴를 더 겪어야 했다. 그래도 패왕은 별로 성내는 기색 없이 보고만 있다가 밤이 되자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오늘 우리 군사들도 많이 다쳤으나 적도 전에 없이 큰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조용한 오늘밤이 그 점을 적에게 알게 해 내일 싸움에서 사기를 꺾어 놓을 것이다. 오늘밤은 성을 치지 말고 모두 쉬도록 하라.”

그리고 북문 쪽을 에워싸고 있던 용저에게 따로 가만히 일러주었다.

“장군은 내일 일찍 북문을 틔워 주고, 북쪽으로 십리를 더 물러나 성고로 가는 길목을 지키도록 하라. 북문 밖이 비어 있는 줄 알면 누군가 그리로 달아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다음 날 군사들에게 아침밥을 든든히 먹인 패왕은 다시 전군을 내몰아 성벽 아래에 늘여 세웠다. 그리고 성벽 위까지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나라 장졸들은 들어라. 과인도 그대들과 함께 성벽을 오를 것이니, 오늘이 아니면 날이 없다 여기고 모두 힘을 다해 형양성을 쳐라!”

말뿐만이 아니었다. 패왕은 정말로 갑옷을 여미고 투구 끈을 고쳐 매더니 구름사다리를 번쩍 들고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다리를 성벽에 기대어 놓기 바쁘게 칼을 빼들고 앞서 성벽을 기어오르려 했다. 누군가 패왕의 전포 자락을 잡으며 소리쳤다.

“대왕. 소 잡는 칼을 어찌 닭 잡는 데 쓰려 하십니까? 성벽을 오르는 일은 소장들에게 맡기시고 옥체를 보중하소서.”

그 사이에 장졸 몇이 다투어 패왕이 걸쳐둔 구름사다리로 기어올랐다. 성벽 여기저기 걸쳐진 다른 구름사다리와 밧줄도 마찬가지였다. 패왕의 외침에 기세가 오른 초나라 군사들이 다투어 기어오르니 싸움 나온 개미떼도 그보다 더 악착스러울 것 같지 않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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