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악순환 경제’의 늪

  • 입력 2005년 6월 4일 03시 02분


요즘 산업계에는 ‘희망 마케팅’이 유행이다. 기업의 광고 문구(文句)에도 ‘희망’이란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삶의 팍팍함을 생각하면 뜬금없어 보인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힘든 현실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워낙 가라앉아 ‘심리적 치료제’라도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란다. 외환위기 때도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광고가 많았다.

올해 초 정부는 틈만 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했다. 써먹을 수 있는 지표란 지표는 모두 동원했다. 때로 침소봉대도 했다. 대다수 언론도 현장을 취재하면 바로 과장이나 허구임을 알 수 있는 발표조차 검증하지 않고 맞장구쳤다.

애당초 모래성이었던 ‘착각 잔치’는 끝났다. 정치적 의도가 깔린 통계수치 남용은 한계가 있다. 미국 일본보다도 낮은 1분기 성장률 발표 후 잇따르는 어두운 지표와 발언을 또 열거하지는 않겠다. 실낱같은 희망 끝에 오는 절망은 더 무섭다.

매년 초 정부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늘 ‘꽝’이었다. 경제 관료들이 TV에 나와 자신도 못 믿을 장밋빛 진단과 전망을 하고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악순환 경제의 늪’은 현 정부 들어 3년째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경기는 양극화를 넘어 빈곤화로 치닫는다.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춰도 소비와 국내 투자는 꿈쩍 않는다. 해외로 돈과 사람이 빠져나간다. 중산층과 서민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일자리는 하늘의 별따기다. 성장률이 추락하는데 세금은 늘고 재정은 악화일로다.

악순환의 사슬이 빨리 끊어질 가능성도 낮다. 소비자들이 얄팍해진 지갑을 쉽게 열 것 같지 않다. 제대로 된 글로벌 기업은 몇 안 되고 지금 잘나가는 기업도 내일을 겁낸다. 새 사업에 뛰어들 엄두도 못 내니 반도체 자동차 철강 다음에는 무얼 먹고 사나.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내년에 더 나빠진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층 높아진 안보불안의 파고(波高)는 경제를 또 얼마나 옥죌 것인가. 설마 했던 ‘잃어버린 5년’이 눈앞에 다가왔다.

한국경제의 추락을 피하려면 정말 여유가 없다. 경제부총리조차 우리 경제에 남은 시간은 길어야 10∼15년 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조차 너무 낙관적일지 모른다. ‘아르헨티나의 실패’처럼 ‘한국의 실패’가 연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1차적 책임은 명백히 정부에 있다. 효율과 경쟁력 대신 선악(善惡)의 어설픈 이분법으로 경제에 접근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었나. 대통령이 공약한 ‘눈물을 닦아 주는 정부’는 어디로 갔는가.

경제 실정(失政)의 책임을 따지는 것은 지겹고 때론 허망하기까지 하다. ‘크고 경박한 권력’ 안팎의 신(新)기득권층이 그들만의 선민(選民)의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모습도 이제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경제의 총체적 위기를 경고하고 ‘21세기형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최소한의 상식에 입각해 세상 흐름을 읽는다면 포기할 수 없는 책무라고 믿는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그 뒤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므로. 아무리 강퍅한 인간과 집단도 언젠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까지 버릴 순 없으므로.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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