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74년 英작가 서머싯 몸 탄생

  • 입력 2005년 1월 24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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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오랜 친구 한 명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큼직하고 오래된 여행가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가방에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신(神)만이 알 뿐’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몸은 1874년 1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파리주재 영국대사관의 고문 변호사. 유복한 가정이었지만 8세에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10세에 아버지를 암으로 잃고 고아가 된다. 이후 목사이던 엄격한 숙부 밑에서 외로운 10대를 보낸다.

의사가 되기 위해 런던 성 토머스 병원에서 보낸 몇 해 동안 그는 ‘신은 없다’는 믿음에 빠져든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고통과 죽음. 자애 넘치는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누비면서 무신론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일기에 “그런 참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썼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홀연히 남태평양으로 떠난다. 영혼과 육체의 안식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영국 비밀 기관에 채용돼 독일의 속령에 파견된 것이었다. 몸은 스파이의 본질을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냉정, 고독, 신중, 과묵…. 스파이에게 필요한 덕목들이 차례로 그의 내면으로 들어왔다.

지상낙원이라는 남태평양의 적요(寂寥) 속에서 그가 떠올린 건 음울하고 퇴폐적인 천재 예술가가 안개 자욱한 삶에 갇히는 스토리였다. 대표작 ‘달과 6펜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폴 고갱. 그는 현실에서 아내와 5명의 자식을 버리고 타히티로 떠나 소녀들과 사랑을 나누다 매독으로 죽어갔다. 고갱의 모습에선 몸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성적(性的) 취향이 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여성에 대한 평범한 사랑은 뜻대로 안 됐다. 동성애적인 성향이 결혼 생활을 계속 괴롭혔고 결국 11년 만에 아내와 결별한다.

몸은 당대 최고의 작가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도 그런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해주면 좋을 뿐.

‘달과 6펜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천재,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야. 하지만 그것을 가진 자에게는 무거운 짐이지. 우리는 그들에 대해 너그럽지 않으면 안 돼요.”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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