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입력 2004년 10월 29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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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속어 중에 ‘초를 친다’는 말이 있다. 기사 작성 때 보도하는 내용의 한 측면을 부각시켜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초를 잘 쳤다’는 말은 호소력 있게 기사를 썼다는 의미로 통할 때가 많다. 언론계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초 친 기사’의 예로 1963년 11월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씨 귀국 보도가 있다. 이씨는 55년 만에 귀국하면서 “떠나던 그날도 그렇더니 바람이 차다. 내 땅이구나”라고 했다고 보도됐는데, 당시 이씨는 신병 때문에 말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동안 언론계에선 1968년 12월 북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이승복군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도 ‘초 친 기사’의 예쯤으로 여겨 왔다. 이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는 조선일보 기사를 놓고 당시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너희는 왜 그렇게 못 썼느냐’는 데스크의 질책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다가 1992년 이것이 ‘허구 조작 작문기사’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승복 진실 보도 공방’이 시작됐다. ‘초 친 기사’와 ‘오보(誤報)’는 엄연히 다르다.

▷엊그제 법원은 조선일보 기사가 ‘기자의 현장취재를 통한 사실보도’임을 확인했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았지만, 이로써 10년 이상 지속돼 온 논란은 일단락을 맺게 됐다. 하지만 씁쓸한 뒷맛은 남을 것 같다. 작게는 ‘공산당이 싫다’는 말의 진위 공방으로 이군 가족이 겪었을 고통이 안쓰럽고, 크게는 우리 사회 일각에 ‘이승복은 허구’라는 그릇된 주장이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 안타깝다.

▷이 참에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론학에서 기자는 ‘사실을 발굴하는 전문가(fact-finding spe-cialist)’다. 이승복 사건 때 조선일보 기자는 ‘나는 공산당이 싫다’는 말을 발굴 보도했다. 기자가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 취재를 통해 한 걸음 더 나간 보도를 한 것이 훗날 거짓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의도’다. 사실 전달 과정에서 객관성이 유지된다면 설령 ‘초 친 기사’라고 해도 용서될 수 있다. 그러면 조작 주장을 제기한 쪽의 의도는 과연 순수했을까?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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