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天倫과 과거 단죄

  • 입력 2004년 8월 22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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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부친의 일본 헌병 오장(伍長) 경력을 숨긴 것과 관련해 19일 의장직을 사퇴했다. 그는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을 찾아가 김우전 광복회장에게 “아버님을 대신해 용서를 구한다”며 사죄도 했다.

신 전 의장이 그의 부친으로부터 고문당했다고 증언한 분들에게 직접 사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그는 의장직 사퇴로 일단락하려는 듯하다.

이처럼 과거사 규명은 ‘교훈을 주기 위한 기록’이라는 취지와 달리,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잘못을 속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시한폭탄’이다. 과거사 규명 법안에 처벌 조항이 없으므로 후손에게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친일파의 아들’ ‘독재자의 딸’이라는 낙인 자체가 공적 활동을 그만두라는 요구 아닌가. 홍위병이 아니고서야 아들에게 아버지를 단죄하라고 강요할 순 없고, 공자도 “아버지의 잘못을 세 번 간(諫)해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따르라”며 ‘천륜(天倫)’의 무게를 가르쳤다.

경험하지 못한 과거는 특정 의도를 가진 현재의 상상력으로 재단될 가능성이 높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는 저서 ‘나의 해방 전후’에서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윤동주의 창씨개명이나 몽양 여운형이 방공(防空) 연습 때 민간유지 자격으로 완장을 찬 것을 예로 들며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표피적인 판단으로 만족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겨레의 끝없는 자기 비하”라고 말했다.

더구나 우리는 과거 100년 동안 망국(亡國)의 절망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동안 고도성장과 혹독한 군사정권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격랑 속에서 흠결 없는 가족사를 지닌 이들이 얼마나 될까.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 상구 형제처럼 좌우익으로 갈라져서 눈에 핏발을 세운 형제도 있을 것이고, ‘삼대’의 조씨 일가처럼 민족 운동가의 딸을 버린 아버지나 민족 운동 자금을 지원한 아들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헝클어진 과거에 대한 규명이 자기 허물을 외면하고 남의 허물을 들추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신 전 의장도 과거사 규명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부친의 전력으로 인한 부담을 털어놓지 못했다. 사건이 불거진 뒤에야 그는 “아버지 인생을 내 맘대로 매도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내면의 고뇌를 토로했다.

특히 과거사 규명을 넘어 청산의 완장을 찬 이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실패와 거짓의 역사’로 규정한다. 이들은 독단적인 이분법으로 한쪽 역사의 일방적 청산을 주장한다. 이들에게서는 과거 청산은 미래의 진보를 빌미로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진보적 (방법론적) 폭력’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런 식이라면 규명을 통해 밝혀진들, 아버지의 과거를 ‘온전한’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자식이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한으로 응어리질 것이고, 우리는 그런 한 맺힌 광기의 굿판을 6·25전쟁 때 좌우익간 보복의 악순환으로 체험한 바 있다.

과거사 규명이 현재 갈등을 빚고 있는 세력간의 화해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현재의 자식들이 화해하지 않으면 과거의 아버지들도 화해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그런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허엽 문화부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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