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6>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3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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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王이 되어(9)

그 다음으로 한신을 잘 안다고 찾아온 군사 하나도 좋은 말은 들려주지 않았다.

“그 사람 멀쩡한 허우대에 긴 칼만 차고 다녔지 실상은 보잘 것 없는 졸장부라고 들었습니다. 한번은 회음 저잣거리의 불량배 하나가 지나가는 그의 길을 막고 ‘네 비록 큰 키에 칼 차고 다니기를 좋아하나 속은 겁쟁이에 지나지 않음을 내가 안다’며 이죽거렸습니다. 그리고 또 ‘네가 사내다운 용기가 있다면 그 칼을 뽑아 나를 찌르고, 그럴 용기가 없다면 내 가랑이 밑을 기어 가거라’며 짐짓 욕을 뵈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만히 그 불량배를 쳐다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몸을 구부려 그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갔다고 합니다. 그 뒤 회음에서는 겁쟁이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 사람, 한신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신이 초나라에서 했다는 낭중(郎中) 벼슬도 실은 패왕의 군막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잡일이나 거들던 집극랑(執戟郞)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번쾌가 원래 그리 사람 보는 눈이 어두운 사람이 아니나, 원체가 타고난 무골(武骨)인 데다 좋지 않은 소리만 듣고 보니 한신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군막에서 내쫓지는 않은 채 한왕 유방에게 한신이 투항해 온 일을 알렸다.

번쾌의 말을 들은 유방도 한신을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신을 한번 불러 보는 법도 없이 말했다.

“그래도 한창 기세를 떨치는 패왕을 버리고 나를 찾아온 사람을 모르는 척 할 수야 있겠느냐? 초나라에서 낭중이었다 하니 우리도 낭중 벼슬을 주고 연오(連敖)로 일하게 하여라.”

연오라면 주로 손님 접대를 맞는 벼슬아치로 창을 들고 다니는 일(執戟郞)보다 별로 나을게 없었다. 그런데도 한왕은 크게 보아주기라도 한 듯 한신을 연오랑으로 삼았다.

항량이 살았을 때부터 항우를 따랐던 한신은 좋은 계책을 내놓아도 항우가 써주지 않아 실망을 거듭해 왔다. 거기다가 함양에 들어온 뒤로 항우가 저지른 실책들은 더욱 한신의 실망을 키웠다. 그리고 한생(韓生)을 죽여 관중을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갈 뜻을 밝힘으로써 한신이 품고 있던 마지막 기대까지 접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신이 한왕을 찾아온 것은 처음부터 높은 벼슬을 구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초나라 군중을 빠져나와 험한 산길을 며칠씩이나 헤매다가 찾아온 길이라 그만큼 기대도 자라있었다. 한왕 유방의 그처럼 허술한 대우에 적잖이 상심했다.

(잘못 왔구나. 차라리 항우 밑에 남아 그의 남다른 기력이 뺏어 모은 부귀의 부스러기나 얻어먹고 있는 게 나았다. 항우와 같은 기력이 없으면 요순처럼 어질거나 세상 보는 눈이라도 밝아야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유방이란 작자는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거만하고 무례할 뿐이로구나.)

그런 생각에 한신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내 팔자가 실로 기구하구나.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대장부의 뜻을 한번 펼쳐보나 했더니 여전히 밥 비럭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다. 천하 한구석으로 쫓겨나는 제후의 연오가 되어 있지도 않은 손님 접대를 맡아 밥을 먹으니 비럭질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결국 이렇게 살다가 끝나게 되어 있는가….)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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