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2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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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王이 되어(8)

남아 있는 한왕 유방의 장졸들 사이에서도 벌써 향수병(鄕愁病)의 조짐이 돌았다. 그들은 저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곳에 있을 적의 대수롭지 않은 추억담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제후들 밑에 있다가 한왕을 흠모해 스스로 따라온 사졸들도 그런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험한 잔도(棧道)를 지나 남정(南鄭)으로 가고 있는 한왕에게도 이따금씩 작은 위로는 있었다. 아직도 한왕을 흠모해 멀고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다른 제후군의 장졸들이 바로 그랬다.

하기야 그들의 흠모는 뒷날의 아첨하는 선비들이 말하듯 너그럽고 어진 한왕의 덕을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한왕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를 따름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난세의 영악함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힘이 없어 한구석으로 몰리는 한왕을 따라 거기까지 온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군(漢軍) 장졸들은 언제나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생김과 차림부터가 좀 별난 손님 하나가 남정으로 가는 한군의 꼬리를 따라잡고 한편으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키가 여덟 자에 얼굴이 허여멀쑥한 데다 비단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것이 다른 제후군의 이름 없는 졸개 같지는 않았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무얼 하다 왔소?”

그 손님을 처음 맞게 된 한군 하나가 그 생김과 차림을 만만치 않게 보고 그렇게 물었다. 그 손님이 제법 거드름까지 피우며 대답했다.

“나는 초나라의 낭중(郎中) 한신(韓信)이라는 사람이요. 한왕을 따르고자 왔으니 윗전에 기별해 주시오.”

이에 그 군사는 한신을 먼저 번쾌에게로 데려갔다. 번쾌는 멀쑥한 허우대와 의젓한 차림에 넘어갔다. 장수로 대접해 자신의 군막에 들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한신을 알아볼 눈은 없었다. 먼저 음식을 내어 대접하면서 부리는 군사들 가운데 한신을 아는 자가 있는지 수소문해 보게 했다.

오래잖아 회음(淮陰) 출신의 보졸 하나가 먼저 한신을 잘 안다고 나서며 말했다.

“고향에는 그 한신을 한(韓)나라 왕손(王孫)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실은 비렁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벼슬을 할 만한 재주도 없고 장사로 먹고 살 만한 수완도 없어 늘 남에게 얻어먹고 살았지요. 처음에는 하양(下鄕)마을의 남창정장(南昌亭長)과 친해 그에게서 밥을 빌어먹었는데, 그 아내가 어느 날 새벽같이 밥을 지어먹고 한신이 가도 아침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공밥을 얻어먹는 한신을 밉게 보아 일부러 그런 것이지요.

그러자 한신은 남창정장과 의절(義絶)하고 회음 성 아래 물가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품삯 받고 빨래하는 아낙[표모]하나가 한신이 끼니도 거르고 낚시질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빨래 일이 끝날 때까지 달포가 넘도록 밥을 나눠주었지요. 그런데도 한신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아낙에게 반드시 그 은혜에 보답하겠노라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제야 빨래하는 아낙이 성을 내어 ‘대장부 되어 스스로 밥도 벌어먹지 못하기에 불쌍히 여겨 밥을 나눠 주었을 뿐이니, 어찌 보답을 바랐겠는가!’하며 한신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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