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4>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1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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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王이 되어(7)

“내 되도록이면 자방선생의 맑은 대의를 지켜주려 하였으나,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이대로 보낼 수가 없구려. 한왕(韓王) 성(成)은 그 사람됨이 무르고 여려 큰일을 하기는 어려울 듯싶소. 이번에 겨우 왕호와 봉지(封地)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이 같은 전란의 시대에 아무 세운 공도 없이 혈통만으로 얻은 나라와 왕위가 가봐야 얼마나 가겠소? 게다가 자방이 나를 따라 관중에 들어온 일도 패왕의 심사를 적잖이 건드린 듯했소. 한왕 성은 아무래도 그 앞날이 밝지 못하니, 자방은 차라리 여기 남아 나를 도와주는 게 어떻소?”

그러자 장량이 여자처럼 고운 얼굴 가득 슬픔을 띠면서도 결연하게 한왕(漢王) 유방을 올려보며 말했다.

“대왕께서 제게 베푸신 무거운 은의로 보면 이 량(良)은 백번이라도 여기 남아 대왕과 흥망을 같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왕 성은 죽은 무신군에게 제가 우겨서,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에서도 가려 뽑아 세우게 한 왕입니다. 또 저의 아비 할아비는 그 한나라 왕실에서 다섯 대에 걸쳐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 형세가 좋지 않다고 아비 할아비의 나라와 그 왕실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나라와 임금이 살아있다면 한(韓)나라는 저의 나라이며 그 임금은 제 임금입니다.” 그래놓고는 숨을 가다듬은 뒤에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이제 저의 나라와 저의 임금을 찾아 한나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대왕께 입은 은혜를 못 잊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대군이 지나는 대로 잔도(棧道)를 불살라 버리십시오. 그렇게 길을 끊어버리면 제후들의 도병(盜兵)이 뒤쫓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 동쪽으로 되돌아갈 뜻이 없으심을 보여주어 패왕의 의심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럼 나더러 한평생 파촉에 갇혀 지내란 말이오?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다시 관중으로 나온단 말이오?”

한왕이 어두운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나 장량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깨우쳐 주었다.

“그때는 또 그때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 급한 것은 아무 탈 없이 패왕과 범아부(범亞父)의 독한 손길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왕 유방을 떠나 한나라로 돌아갔다. 한왕은 그런 장량을 십리나 배웅하며 아쉬움과 남은 정을 아울러 드러냈다.

포중에서 남정까지의 남은 길은 옛 시인들이 노래한 ‘촉도난(蜀道難)’의 시작이었다. 구름 걸린 산마루를 넘어가는데, 길이 꼬불꼬불하거나 기어 올라가야할 만큼 가파른 것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중턱에 굴을 파듯 파고 사람 한둘이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해 걸을 만큼의 길을 열어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예 홈을 파고 통나무를 박아 넣어 사다리를 산 중턱에 뉘어서 걸어놓은 것 같은 구름다리 길을 만들어둔 곳도 있었다.

거기까지는 용기를 내어 따라왔던 장졸들도 차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한중 파촉(巴蜀)까지 따라들어 갔다가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먼저 동쪽을 고향으로 둔 병사들이 대오를 빠져나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서북지방 출신의 사졸들마저도 마음이 흔들려 하나 둘 그 뒤를 따랐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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