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2>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1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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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王이 되어(5)

연(燕)나라 장수 장도(臧도)는 일찍부터 초나라를 도와 조나라를 구원하였고, 또 항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싸운 공이 있었다. 연왕(燕王)이 되어 연나라 땅 대부분을 봉지로 받고 계(계)에 도읍했다. 그러나 본시 연왕이었던 한광(韓廣)은 제 땅에만 박혀 있다가 항왕의 눈 밖에 났다. 연나라 땅 한 조각을 얻어 요동왕(遼東王)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제(齊)나라 왕 전불(田불)도 연왕 한광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나라 안에 머물면서 진을 쳐부수는 데 별 공이 없어 제나라 땅 한 조각과 함께 교동왕(膠東王)으로 밀려났다. 그에 비해 제나라 장수 전도(田都)는 제후군과 더불어 조나라를 구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세운 공이 있었다. 전불을 대신해 제왕(齊王)이 되고 임치(臨(재,치))에 도읍하였다.

옛적 진나라의 속임수에 빠져 망한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아들 전안(田安)은 전에 항왕이 장하(장下)를 건너 거록을 구원하려 할 때 군사를 이끌고 항복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항왕을 도와 세운 공이 적지 않아 제북왕(齊北王)이 되고 박양(博陽)에 도읍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제나라 장수 전영(田榮)은 여러 번 항량을 배신한 적이 있는데다, 진나라를 쳐부수는 데도 힘을 더하지 않았으므로 봉지를 주지 않았다.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장이와 싸워 장군인(將軍印)을 내주었으며, 제후군이 관중으로 들어갈 때도 함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나라를 구원하는 데는 공이 컸고, 또 평소에 현능하다는 평판을 널리 얻고 있어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그가 남피(南皮)에 있다는 말을 듣고 부근의 세 현(縣)을 주며 후(侯)에 봉하였다. 그 밖에 파군 오예의 장수 매현(梅현)도 패공 유방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세운 공이 적지 않아 식읍 10만호(戶)를 거느린 후(侯)로 봉하였다.

하지만 서초패왕 항우는 그 모든 결정을 하고서도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제후의 ‘인수(印綬)가 헤지고 도장모서리가 닳도록’ 제 손에 쥐고 우물쭈물하다가 두 달이 넘어서야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뒷사람들은 흔히 그 일을 패왕 항우의 인색으로 이해하지만, 실은 그렇게 다시 천하를 쪼개는 일을 그만큼 망설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4월이 되자 희수(戱水)가에 진채를 내리고 모여 있던 제후들은 하나둘 군사를 거두어 자신의 봉지(封地)로 돌아갔다. 한왕(漢王)이 된 유방도 도읍인 남정(南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한왕의 장졸들은 풍(豊) 패(沛) 땅의 사람들이 많았고,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 동쪽에서 따라온 이들이었다. 자신들이 가야할 곳을 알게 된 그들은 낙담해 마지않았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만 다시 서쪽으로 험산 준령을 넘어 파촉 한중으로 가는구나. 거기다가 패왕은 진나라 땅에 범 같은 세 왕을 남겨 우리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게 하였다니 살아 고향에 돌아가기는 틀렸다. 보고 싶은 부모형제는 언제 만나보게 될 것이며, 가엾은 처자는 누가 돌봐 줄는지!”

그러면서 땅을 치고 통곡하는 사졸도 있었다. 장수들 중에도 파촉 땅에 평생 갇혀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며 칼자루를 움켜잡는 자들이 많았다. 한왕도 패왕 항우의 기세에 눌려 봉지라고 받기는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새삼 서글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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