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17일 18시 40분


코멘트
漢王이 되어<4>

위표(魏豹)는 진왕(陳王=진승)의 장수 주불(周불)에 의해 위(魏)나라 왕으로 옹립되었다가 그때는 진나라 장수였던 장함에게 져서 죽은 위구(魏咎)의 아우였다. 형이 죽자 초나라에 항복한 위표는 빌린 군사 수천 명으로 옛 위나라 성 스무 남은 개를 되찾아 그 공으로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그 뒤 날랜 병사 수만과 함께 항왕(項王)을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가 진나라 군사를 쳐부순 적이 많았으나, 원래의 제 땅을 지키지는 못했다. 양(梁=위나라) 땅은 서초패왕이 된 항왕의 봉지(封地)로 빼앗기고 하동(河東)을 대신 받아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서위왕(西魏王)이 되었다.

하구(瑕丘)의 현령이었던 신양(申陽)은 원래 조(趙)나라 승상 장이(張耳)가 총애하던 장수였다. 항왕의 대군이 오기 전에 먼저 하남(河南)을 함락시키고, 하수(河水)가에서 항왕과 초나라 군사들을 맞아들인 공이 있었다. 항왕은 신양에게 삼천군(三川郡) 일대를 떼어주고 하남왕(河南王)으로 세워 낙양(落陽)에 도읍하게 하였다.

한왕(韓王) 성(成)은 죽은 무신군 항량이 세웠으나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다가, 패공 유방의 도움으로 양적(陽翟)을 차지하고 겨우 한(韓)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 항왕을 따라 함곡관에 들게 되었으나, 세운 공이 없는데다 그 사도(司徒) 장량이 패공을 따라 관중으로 간 일이 흠이 되었다. 도읍과 왕호는 그대로 유지했으나, 뒷날 봉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항왕을 따라 팽성으로 가게 된다.

조나라 장수 사마앙(司馬앙)은 일찍부터 용력이 남다르고 기략이 뛰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항우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하내(河內)를 평정하는데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은왕(殷王)이 되어 하내 땅을 봉지로 받고 조가(朝歌)에 도읍하였다.

장이와 진여에 의해 조나라 왕으로 세워진 헐(歇)은 조나라를 쪼개 만든 대나라 왕으로 옮겨 앉았다. 항왕이 관중으로 쳐들어가는데 장졸을 내기는 했으나, 자신은 신도(信都)에 남아 이렇다할 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항왕을 따라 함곡관 안으로 들어간 장이(張耳)는 상산왕(常山王)이 되어 조나라 땅 대부분을 봉지로 받고 옛 신도인 양국(襄國)에 도읍하게 되었다. 진나라를 쳐부수는데 공이 많았을 뿐더러 평소 교유가 넓어 많은 사람이 장이를 왕으로 추천한 까닭이었다.

당양군(當陽君) 경포는 항왕의 선봉장으로서 언제나 싸움터에서 세운 공은 군중(軍中)에서 으뜸이었다. 구강왕(九江王)이 되어 회수(淮水) 이남에서 강수(江水)까지를 봉지로 받고, 고향인 육(六=六縣)에 도읍하였다. 세운 공에 비해 봉지가 넓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때 보인 항우의 인색이 뒷날 경포가 배신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파군(파君) 오예(吳芮)는 백월(百越) 족속을 이끌고 제후군을 도왔으며, 나중에는 항왕을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 형산왕(衡山王)이 되어 구강왕 곁에 넓은 봉지를 받고 주(주)에 도읍하였다.

공오(共傲)가 임강왕(臨江王)이 된 것은 좀 별난 경우였다. 원래 공오는 의제(義帝)의 주국(柱國)으로서 황우를 따라 관중에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팽성에 남은 초나라 군사를 이끌고 남군(南郡)을 쳐서 떨어뜨린 공이 있으므로 임강왕이 되어 강릉에 도읍하게 되었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