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인국/민노당의 실용주의를 기대한다

  • 입력 2004년 5월 27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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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10석에 불과한 의석을 얻었지만 정치권과 여론에 몰고 온 충격은 엄청났다. 당세가 욱일승천하면서 민노당은 ‘2008년에 중원을 장악하고 2012년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를 보면서 세상에선 그간 거리에서 시위로만 표출되던 이 땅의 진보적 요구들이 제도정치권 안으로 수렴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민노당이 ‘과격’ ‘급진’ 이미지를 탈피해 현실 정치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를 동시에 갖는 것 같다.

민노당은 지난 총선에서 처음 채택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혜택을 크게 입었다. 지역구는 단 2석이었지만 정당투표에서 약 13%로 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얻은 것이다. 이 점에서 민노당은 비례대표제의 기본 정신과 철학을 깊이 새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13%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말이다.

비례대표 지지자들이 지역구 투표에서도 반드시 민노당 후보를 찍은 것은 아닐 것이다. 민노당 비례대표 지지자 중에는 아마 이념면에서 민노당과 가까울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역구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가 다수일 것으로 생각되며 민주당의 지역구 후보에게 투표한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개중엔 지역구에서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을 지지한 유권자도 만만치 않게 있었음이 각종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는 민노당의 향후 지향점에 대해 일정 부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민노당의 정치 노선이 노회찬 사무총장의 표현대로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이상에 접근하려는 개량주의 노선’의 스웨덴을 모델로 하고 있다거나, ‘노동계층이 창조하는 고품질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한다고 하면 적극적인 민노당 지지자들뿐 아니라 지역구에서 다른 정당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공감하거나 최소한 크게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민중 수탈의 원흉인 재벌은 반드시 해체해야 하며 미군도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 등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는 지역구에서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큰 거부감을 줄 것이며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아주 흡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모두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유권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적극적인 지지자들만 염두에 두는 정치 이념과 행태는 입지가 지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13%의 비례대표 지지자 중 지역구에서 다른 당을 지지한 유권자를 적극 견인하는 것은 물론, 비례대표 선거에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87%의 유권자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는 넉넉하고 배포 있는 정치 노선과 이념, 그리고 정치력을 보여줄 때에만 ‘2008년 중원 장악’ 등의 포부가 현실성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려면 예컨대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경제난 극복’을 한번 생각해보자. 기업투자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고임금과 강성 노조의 문제 해소에 민노당이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실용주의 노선이야말로 민노당이 우호적 유권자층을 극대화하는 길일 것이다. 민노당의 건투를 빈다.

이인국 한반도 정치경제연구포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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