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영암왕인문화축제’ 백제 석학의 향기 찾아가볼까

  • 입력 2004년 4월 7일 17시 49분


코멘트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월출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영암의 너른 들판. 일본 아스카 문화의 비조인 백제 왕인은 산 아래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래 사진은 왕인유적지에 들어선 왕인동상과 동상 앞에 설치한 왕인박사의 행적 부조. 탄생부터 일본에서 학문전수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제공 영암군청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월출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영암의 너른 들판. 일본 아스카 문화의 비조인 백제 왕인은 산 아래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래 사진은 왕인유적지에 들어선 왕인동상과 동상 앞에 설치한 왕인박사의 행적 부조. 탄생부터 일본에서 학문전수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제공 영암군청
지금으로부터 1599년 전인 405년. 일본인에게는 이후 1600년 동안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한 학자가 일본 땅에 출현한다. 이름은 왕인(王仁), 국적은 백제, 직함은 오경박사(五經博士)다.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는 걸출한 산세의 월출산이 바다를 방불케 하는 영산강과 드넓은 하구 개펄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땅 영암. 거기서도 갯골(썰물 때도 물이 차서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개펄의 골)이 발달해 중국 상선이 수시로 드나들던 국제항 구림마을(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그 마을에서도 숲 우거진 구릉의 양지받이 성기동에서 왕인은 태어났다. 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유추컨대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 때다.

총명했던 왕인은 여덟 살에 월출산의 문필봉 아래 문산재(文山齋)에 입교해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입교 10년 만에 국가고시에 합격해 오경박사에 등용된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상태. 왕인의 도일 10년 전(396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백제를 공격해 50여성을 빼앗고 왕제와 대신을 볼모로 잡아갔던 터였다. 그래서 아신왕(阿莘王)은 일본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내어 사신을 교환하고 있었다.

왕인의 도일 3년 전(402년). 아신왕은 일본 오진(應神)왕의 요청에 따라 공녀(工女·옷 깁는 기술자)와 함께 아직기(阿直岐)를 파견한다. 아직기의 뛰어난 학식에 감탄한 일왕은 그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으며 이렇게 묻는다. “백제에는 그대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는가?”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경위는 대충 이렇다. 왕명을 받은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 10권을 직접 필사한다. 일본에 가져가기 위한 것이다. 그가 고향을 떠나던 날(405년). 성기동 집을 나와 배를 타기 위해 상대포(上臺浦)로 가던 중 왕인은 돌정 고개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성기동 집과 그 뒤편 월출산 중턱의 문산재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이때 왕인은 32세였다.

여러 도공과 종이 만드는 장인 등을 이끌고 도일한 왕인은 일왕의 환대를 받고 태자의 스승이 되어 군신의 교육을 담당한다. 한자의 왜훈과 왜음도 이때 왕인이 개발한 것이고 이것으로 지은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왕인이 일본에서 문학, 문교,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것은 이 덕분이다.

아직기와 왕인의 파견을 통해 보듯 당시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교류는 긴밀했다. 훗날 나당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이런 기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교류 과정에서 일본은 엄청난 것을 얻는다. 유교 불교 문학 천문 직조 수리 철물 등의 선진문물을 전수받게 된 것이다. 왕인이 일본 아스카 문명의 비조로 추앙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일본 고대문명의 중심에 선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왕인은 일본에서 천수를 다한다(묘는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일본 서부의 가와치(可內)에 주로 살았다는 그의 후손 역시 일본의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수많은 후예가 일본의 고대국가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중 이 두 사람이 크게 기억된다. 일본 최초의 대정승이 되어 수많은 불교사찰을 지은 고지(高志), 그의 스승인 도소(道昭)다. 고지는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에 있는 큰 불상을 조성했고 도소는 653년 당나라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일본 불교를 일으켜 ‘살아 있는 부처’로 칭송받는다.

왕인에 대한 기록은 일본에서 주로 발견된다. 고국인 이 땅에는 부실하다. 고향인 영암에서 매년 왕인박사 문화축제가 열리지만 국민의 관심은 그의 화려한 행적에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일본인의 관심이 더 높다 하겠다.

그러나 자책할 일도 아니다. 왕인은 고향을 떠났으니 더 이상 이 땅 사람이 아니었고 당시로서는 일본에서의 행적을 예서 기록할 수도 없었을 터이니. 고려 광종 때 도입한 과거제도를 우리에게 소개한 이가 중국인 쌍기였지만 그 역시 중국 역사서가 아니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봄. 목포와 영암을 잇는 옛 도로의 벚꽃나무 가로수는 활짝 핀 벚꽃으로 벚꽃터널을 이룬다. 왕인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영암왕인문화축제(4월 9∼12일)는 바로 이 춘삼월 호시절(음력)에 열린다. 영암에는 왕인의 생가 터, 왕인이 공부를 하던 문산재와 양사재(養士齋), 배를 탄 상대포, 배 타러 가는 도중 뒤를 돌아보았다던 돌정고개, 왕인이 글을 읽던 책굴과 후대에 책굴 앞에 세운 왕인석상이 남아 있다.

생가 터 주변에는 거대한 왕인유적지도 훌륭하게 조성됐다. 여기서는 ‘학문의 대가’ 왕인을 기리며 대학입시 합격을 기원하는 행사도 함께 열린다. 이 밖에도 매일 다양한 행사가 도기문화센터와 유적지에서 쉼 없이 펼쳐진다.

영암의 벚꽃은 지난 주말로 절정을 이뤘지만 독천(영암군 학산면)∼유적지를 잇는 6km와 군서면소재지의 옛 도로의 벚꽃은 지금도 볼 만하다. 독천 낙지마을의 갈낙탕(갈비탕에 세발낙지를 넣어 끓인 것)도 영암에서는 ‘참새 방앗간’이다.

전남영암=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