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현석]AI가 지원서 대신 써주는 시대… 평가 방식도 재설계해야

  • 동아일보

임현석 디지털랩 전략영상팀장
임현석 디지털랩 전략영상팀장
최근 한 공공기관 정부 지원 사업 심사위원과 담당 공무원에게서 “앞으로 고생길이 훤해졌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검토해야 할 서류량이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말을 종합해 보면, 지난해 말부터 예년 동일 사업들 대비 적게는 20∼30%에서 많게는 몇 배 이상 검토해야 할 서류가 늘었다고 한다.

이전 같으면 복잡한 서류 양식에 막혀 신청을 포기했을 이들이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등에 업고 대거 공모에 몰려들면서 벌어진 현상이라는 것이다. 생성형 AI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 이른바 ‘딸깍’ 한 번으로 전문가 수준의 사업계획서가 수십 쪽씩 쏟아지는 시대다. 생성형 AI가 쓴 글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식인 ‘**’도 지원 서류에서 종종 확인된다고 한다.

매끄러운 문장과 그럴듯한 논리 속에서 실제로 의지와 역량을 갖춘 지원자를 가려내기가 예전보다 훨씬 고단해졌다. 사업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은 있지만 표현할 방법을 몰라 애먹다가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은 지원자와, 처음부터 지원금만을 노리고 AI를 딸깍한 이용자 모두 상향 평준화됐기 때문이다.

진정성 없는 지원자는 사업 과정에서 난관을 맞닥뜨릴 시엔 의미 있는 해법을 모색하지 않고 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더 높다. 오래 고민하고 준비한 쪽과 그러지 않은 지원자를 가려내지 못하는 시스템은 공정하지도 않다.

이러한 시스템의 허점은 예술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난달 한 누리꾼이 “AI 음원만으로 예술활동 증명을 신청할 수 있다”며 소셜미디어에 정부 기관으로부터 받은 예술활동 증명 완료 문자를 캡처한 화면을 공개해 파문이 일었다. 누구든 AI로 만든 음원으로 예술인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지원해 보라는 취지로 공유한 것이다.

수년을 창작에 바친 성악가나 대학 전공 때부터 창작극을 수차례 무대에 올린 연극인이 행정 문턱에 걸려 반려되는 동안, AI로 구색만 맞춘 결과물이 관문을 넘었을지 모른다는 박탈감이 확산됐다. 현행 예술 지원 시스템에 대한 공분도 컸다. 창작의 치열한 과정이나 예술가가 된 기간, 과정, 목표, 실질적인 생계 곤란 상황처럼 지원 취지에 맞는 질문 대신 대외적으로 공표된 결과물만을 서류로 확인해 도장을 찍는 방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AI 딸깍 앞에 공공 시스템의 신뢰는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용자에게 AI를 윤리적으로 활용하라는 문구가 공모전이나 지원 사업 공고문에 들어가는 추세다.

더 나아가 딸깍 시대엔 평가 방식 자체도 재설계해야 한다. 사업계획서든 창작물이든 표현의 완성도만을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람을 가려낼 수 없다. 대면 면접 비중을 높이거나, 서류 안에 문제의식과 사고의 흔적을 담게 하는 방향이 그 출발점이다. 지원자의 삶 속에서 고민의 무게와 의미를 묻거나, 서류 단계에서부터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지 묻는 것. 이는 계획 완성도를 따지며, 사업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졌다. 매끄러운 답변보다 대답하기 전 몇 초 망설이는 고민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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