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신경림, "뿔"

  • 입력 2004년 2월 22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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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 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이려 하면 가고 워워 하면 서면 된다

콩깍지 여물에 배가 부르면

큰 눈을 끔벅이며 식식 새김질을 할 뿐이다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두어 방울 눈물을 떨구기도 하지만 이내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한쪽은 식탁에 오르고

다른 쪽은 구두가 될 것을 그는 모른다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중에서

몸은 있으나 꿈이 없고, 식욕은 있으나 생각은 없고, 굴욕만 있으나 저항은 없다.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몸짓이 잘 길들여진 노예와 식민지 백성을 연상시킨다.

저를 붙잡아 길들이려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뜸베질하며, 주린 사자를 뒷발로 날려보내고, 드넓은 초원을 향해 쿵쿵 달려가는 아프리카 검정 물소의 콧김은 얼마나 당당한가.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 번도 쓴 일이 없’는 외양간 일소가 반면교사가 되었구나.

하지만 일소의 저 순박한 눈망울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건 웬일인가? ‘사나운 뿔’보다 ‘사나운 지혜’로 짐승을 상하고, 곤충을 상하고, 물과 구름을 흐리고 결국 저와 세상을 모두 상하게 하고야 마는 어떤 뿔 없는 짐승들의 뜸베질이 자꾸만 떠오른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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