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설날의 추억

  • 입력 2004년 1월 20일 16시 27분


크리스마스가 젊은이의 축제이고, 추석이 나이 지긋한 이들의 명절이라면, 설날은 어린이들의 대목이다. 열심히 발품을 팔면 몇 달치 용돈을 ‘일시불’로 너끈히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친척 집에 가기 싫어하는 요즘 아이들도 이날만은 예외다. 설날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손님은 빳빳한 세뱃돈을 정성껏 봉투에 넣어 주는 어른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아도 세뱃돈에 인색한 친척은 집안 어른으로 대접받기 힘들다.

▷설날은 또 원근(遠近)에 흩어져 사는 일가친척이 떡국 한 그릇을 나누며 한 해의 덕담과 기원을 나누는 날이다. 대가족 제도의 장점과 핏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날이기도 하지만 자칫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사업이나 대학 진학에 실패했거나 노처녀 신세를 면치 못한 이들에게는 무척 괴로운 날이기도 하다. 사려 깊은 어른들은 그래서 말 한마디에도 조심 또 조심한다. 잘사는 자식보다는 못사는 자식, 잘나가는 쪽보다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에 대한 배려가 더욱 중요하다.

▷올해도 200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귀성길에 올랐다. ‘카드깡’을 해서라도 설에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한국인이다. 60, 70년대에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해 ‘식모’와 ‘공순이’ 생활을 하던 소녀들도 부모 내의와 동생들 학용품을 싸들고 시골로 내려가곤 했다. 고향의 부모 형제에게 그들은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는 했지만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는 경우가 많았다. 올 귀성객 중에도 말 못할 사연과 고통을 가진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설날이 한국인의 귀소(歸巢)본능을 자극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전통의 명절로 자리 잡은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본다.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을 희생해가며 집안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사려 깊은 어른과, 문턱이 닳도록 찾아오는 손님을 거뜬히 치러낼 수 있었던 후덕한 주부를 첫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의 어른노릇 하기를 마다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일종의 시대적 병리인 ‘명절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주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마당에 과연 언제까지 ‘설날의 추억’이 이어질 수 있으려나….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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