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비밀은 없다

  • 입력 2003년 7월 22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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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나 돈을 달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다.’ 정치판에 나도는 돈과 관련된 얘기들이다. 한국에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그만큼 자금 조달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돈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명문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인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바로 돈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올해 들어 정치와 돈이 연결된 사건이 유독 많았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라종금 사건, 대북 송금 사건 수사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150억원+α’, 굿모닝게이트와 여기에서 시발된 대선자금 문제…. 대선자금 공개 문제는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됐다.

떳떳하지 못한 돈의 행방에서 다시 한번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발견한다. 어쩔 수 없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이를 위해 구린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정치 현실이 부끄럽다. 그러나 돈과 관련된 사건이 잇따라 터져 나라가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정치자금이 투명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시끄러워져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회의 진화(進化)를 앞당기는 촉진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정치판에 큰돈이 오가면서도 모든 것이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부패한 권력이 검찰 등 사정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라 감춰지는 게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부패에 연루된 인사들은 더 이상 비밀을 감추기가 어렵다. 집권당 대표의 수뢰 의혹이 수사 대상이 되고 그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는 시대가 됐다. 나라종금 사건으로도 여러 전직 고위 관리들이 쇠고랑을 찼다. 지난 정권에선 대통령 아들이 두 명이나 구속됐다. “옛날에는 큰돈을 받고도 아무 탈이 없었는데 이제 그보다 적은 돈을 받아도 다 밝혀진다”는 한 정치인의 말에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한다.

‘150억원+α’ 비자금 사건과 굿모닝게이트 수사가 진행되면서 정치권엔 긴장감이 가득하다. 수사 결과 상당수 정치인들이 무대에서 퇴출될지도 모른다.

정치와 돈의 부적절한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며 정치권에는 정치자금법 개정 등 제도 개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인이 어디서 돈을 받아 어떻게 쓰는지 그 경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 검은돈의 흐름을 제도적으로 차단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나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부패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치인의 의식에 내면화돼야 한다.

중국 후한시대 고사 중 ‘사지(四知) 비화’가 있다. 어느 날 양진이라는 관리가 지방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현령 왕밀이 찾아왔다. 왕밀은 황금을 내놓으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걱정 말고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양진은 그를 꾸짖었다. “이 사람아, 하늘이 알고(天知), 땅이 알고(地知), 당신이 알고(子知), 내가 아는데(我知) 무슨 소리인가. 당장 돌아가게.” 기성 정치인들이나 앞으로 정치판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새겨야 할 고사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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