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임성호/이념정당이 最善 아니다

  • 입력 2003년 7월 8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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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조건이 바뀌게 마련이다. 시대 적실성이 중시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과거에 지향하던 것을 오늘에도 똑같이 추구해야 한다고 무조건 생각해선 곤란하다. 자칫 ‘시대착오’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진보-보수는 산업사회 구도 ▼

이 자명한 이치는 요즘 정치권의 화두인 이념정당과 관련해 음미해 볼 만하다. 이념정당은 한국정치에서 오랫동안 이상적 목표로 갈구되었다. 정당들이 분명한 이념색채를 띠고 이념에 따른 대립구도를 형성할 때 사적 권력욕에 휘둘리는 기성정치를 변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공감을 자아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가 상당히 진척된 1990년대에도 정당구도가 지역주의 감정과 극소수 보스간의 권력다툼에 따라 결정되었으니 갈망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이념정당은 비합리적 지역갈등과 권력지상주의적 정치행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혹시 이것은 과거만의 일이 아닐까. 이념정당의 시대 적실성은 오늘날의 바뀐 환경 속에서 상대적으로 낮아지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국회의원 5인의 한나라당 탈당을 보며 품어 본다. 이부영 의원을 비롯한 탈당 의원들은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 정책정당 건설, 낡은 정치 청산 등의 명분을 강조하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그들의 공통분모는 진보적 이념 성향이다. 그들의 이념에 비해 너무 오른쪽에 위치한 한나라당을 떠나 진보적 이념정당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탈당을 이끌었을 것이다.

5인의 결정을 기회주의적 행태라고 일언지하에 비하할 순 없다. 물론 그들도 각기 정치적 계산을 했겠지만, 나름대로 명분을 세웠고 당장 눈앞의 이익만 따른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기존 철새 정치인들과 동일시하긴 힘들다. 정당정치의 제도화를 깨뜨린다거나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며 탈당한 데는 이념정당을 향한 그들의 신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고심에 찬’ 결단이 시대상황에 잘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념정당이 오늘날에도 한국정치의 해결책으로 찬미받기엔 사회경제적 조건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사회균열 구도가 단순했던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진보 대 보수’라는 이념대결 축을 통해 국정이 무난히 운영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념정당이 지역주의나 사적 권력욕을 극복하는 훌륭한 처방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사회 이익이 파편처럼 분화되며 사회균열 구도가 매우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탈산업화와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진보-보수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로는 급변하고 복잡다기한 사회세력의 이익들을 잘 반영하기 힘들어졌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추상적 이념 틀에 지나치게 구속될 때 자칫 다양한 이익과 요구를 균형 있게 충족시키지 못할 수 있는 시대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념정당은 과거에 진작 만들어져 작동됐어야 했다. 그런 과거를 거쳐 이제는 새로운 시대조건에 따라 탈 이념화를 시도할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권위주의적 억압과 지역주의적 권력투쟁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 이념정당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 잘못 끼워진 역사가 후대에 계속 악영향을 미치듯, 이념정당 단계를 경험하지 못한 것에 강박증을 느껴 이제라도 이념정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집착한다면 시대착오의 우를 범할 수 있다. 정당의 아이덴티티는 물론 유지해야 하겠지만, 이제는 거창한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용적 정책대결에 몰두할 때다. 만약 시대 적실성을 간과한 탓에 정당이 여러 사회세력들의 이익을 균형 있게 잘 대변해내지 못한다면 한국정치의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

▼실용적 정책대결 필요한 시대 ▼

이번에 탈당한 5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야 의원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원론적 이념정당은 최선의 방향이 아니다. 이념에 얽매이기보다 각 의원의 자율성을 높여 유권자와 보다 융통성 있고 실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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