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국기에 대한 맹세'

  • 입력 2003년 5월 21일 18시 22분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68년 충남도 교육위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보급한 것이 시초다. 72년 문교부가 이를 받아들여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시행토록 했고, 84년 2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1361호 제3조)으로 법제화됐다. 비록 군사독재 시절이었지만 지방교육위가 자발적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독재 정권의 통치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다. 엄밀하게 말해 ‘국가’와 ‘정권’은 구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얼마 전 ‘캐주얼 복장 의원선서’로 논쟁을 빚었던 유시민 국회의원이 이번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파시즘과 일제(日帝) 잔재라며 “주권자로 하여금 공개적인 장소에서 국가 상징물 및 국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유 의원은 2002년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내팽개쳤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에도 한 인터넷 매체에 ‘태극기, 던졌으면 또 어때!’라는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번 발언이 우발적인 해프닝은 아니라는 말이다.

▷유 의원의 말을 선의로 해석하면 ‘과도한 국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를 파시즘이나 일제 잔재라고 혹평한 것은 지나쳤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파시즘의 산물이라면 유치원에서부터 이를 암송시키는 미국도 파시즘 국가란 말인가? 1942년에 이미 ‘국기에 대한 맹세’를 법제화한 미국에서 국민에게 이를 강제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또 일장기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했던 일제강점기와 우리의 국가 상징에 대한 예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국기하강식 때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고 눈총 받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국가에 대한 경의 표시는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오히려 지난해 월드컵 때 전국의 도시를 수놓았던 태극기 물결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이제 자발적인 애국심의 분출에서 진한 감동을 느낀다. 하지만 ‘형식’은 필요하다. 개인간의 사랑도 말로 표현할 때 더 깊어지듯 애국심도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형식을 통해 더 고양될 수 있을 터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싫으면 그만둘 일이다. 그걸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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