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4월 25일 17시 51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여성은 이름이 없었던 시대인 조선에서도 뚜렷한 이름과 자(字), 호(號)를 지녔고 그 이름이 국경을 넘어 천재시인으로 불렸던 이가 바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그는 허씨의 5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그 일부만이 남아 동생 허균의 손을 거쳐 1608년에 ‘난설재집(蘭雪齋集)’으로 간행됐다. 그의 시는 평범한 규방시인의 범주를 넘는 초월적 상상력과 세련된 형식미를 갖춘 것으로 높이 평가돼 왔다. 그는 “조선에서, 여자로, 김성립의 처로” 살아야 함을 ‘세 가지 한(恨)’으로 여겼으나, 그 콤플렉스 속에 안주하지 않고 시를 쓰며 선계(仙界)로 비상하는 나비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거울 속 난조(鸞鳥)’처럼 겨우 27세에 삶을 접었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그를 현대적 담론의 자리로 끌어내려 했으나,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리매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모처럼 그의 시에 담긴 상징과 기호를 잘 풀어 21세기의 한국 여성들 앞에 마주 앉혀 놓은 역작이다. 저자는 중국에 전래된 허난설헌의 시와 관련된 문헌들을 검토하고, 그 바탕 위에 그의 시세계를 성실하게 조명하며 연보와 ‘난설재집’을 덧붙여 책을 엮어냈다. 이 책은 허난설헌의 생애와 문학을 현대적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분석하되 쟁점별로 관련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정리했다. 남편과의 갈등과 상처, 학문적 성장과정과 시 창작, 중국문단의 반응, 표절 시비 등이 그의 주요 관심사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시에서 펼치려 했던 그에 대해 박지원과 홍대용이 서로 판이한 견해를 보인 점이나, ‘조선시선(朝鮮詩選)’ ‘고금여사(古今女史)’ 등 명대(明代) 서적들이 허난설헌의 시를 평가하고 수록한 과정을 세밀히 검증한 것이 돋보인다.
또 표절 시비의 시대상황적 배경이라든가 명나라 문단의 이문화(異文化) 현상이 허난설헌 시집의 출판 동인이 되었던 사실에 주목한 점도 예리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연구 성과는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한 중국문헌자료들에 견주어 풀어 놓은 ‘유선시(遊仙詩)’의 신화적 해석에 있다. 허난설헌이 ‘규방’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선계(仙界)는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여신들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계가 너무나도 인간적이라는 지적이 이채롭다. 여성의 굴레를 벗으려는 시도, 인간적 고뇌를 탈피하고자 했던 노력이 결국 너무나도 여성적이고 인간적인 천상(天上)의 사랑으로 귀납됐다는 말이다. 유선시 작품을 분석한 곳 중 일부에서 작품 내 등장인물의 이미지를 시인 자신으로 확대해석한 흠은 아마도 텍스트에 대한 지나친 애정 몰입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허난설헌의 삶과 시를 마무리하는 일은 아무래도 독자의 몫인 듯하다.
정연봉 배재대연구교수·국문학 jybong54@hanmail.net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