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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4월 25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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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용품이, 누군가 지나치듯 던진 말이, 솔솔바람에 실려 온 향기가 옹이 진 기억 한 자락을 순식간에 잡아챌 때가 있다. 어느 날 무심하게 디디는 발끝을 향해 반짝 빛을 쏘아대는 동전처럼 그렇게.
소설가 송기원(55)은 선배 작가의 웃는 얼굴, 느닷없이 걸려온 초등학교 동창의 전화와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삶의 비밀이 숨겨진 장터 사람들을 불러낸다.
동네사람에게 겁탈을 당해 고향을 떠난 ‘당달봉사’ 끝순이 누님과 유복자로 태어나 눈칫밥을 얻어먹어 그런지 걸핏하면 울곤 했던 외사촌형 유생이, 새재에 중국집을 내고 뿌듯해했던 폐병쟁이 성관이 등이 ‘나’의 기억을 헤치고 나온다.
작가 자신이 자라난 질퍽한 장터와 그곳 사람들의 삶에 바쳐진 이야기들은 생생하고 신명난다. 그러나 그 면면에 쓰게 삼키고만 눈물이 배어나 오히려 마음에 이는 물결은 거세다. 송기원이 펼쳐 보이는 옛 시절이 아련한 추억보다는 상상력으로 찾아낸 절실한 기억인 까닭이다. 그 속에서 힘들게 빚어진 진실함이 빛을 발한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송기원 문학의 비밀은 그 영혼 속에서 경련처럼 일어나는 장터와의 치열한 투쟁에 있는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연작 소설집에 묶인 9편의 단편은 신산한 가족사라는 굵은 줄기로 얽혀 있다. 다들 하나같이 기구한 인생이지만 따지고 보면 누군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건조한 삶을 환기시키는 남다른 힘이 강한 악력으로 독자를 붙든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동복누님인 양순이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됐다는 사실을 외조카에게서 듣게 된다. 천수(天壽)와 거리가 멀었던 생부와 어머니부터 큰아버지, 의부, 호적상의 어머니까지. 그들의 심상치 않은 죽음에서 ‘나’는 핍박한 인생과 결부해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곤 했다. 누이마저 떠나면 출생에 대한 상처를 홀로 껴안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억척스럽게 세탁소를 운영하며 단 한푼도 허투로 돈을 써본 일이 없는 양순은 간암으로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동생과 복요리를 먹으러 간다. 식사 후 누님의 아파트에서 ‘나’는 누님의 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나’의 염려와 달리 누님의 아버지 이야기는 술술 풀려 나왔다. 지긋지긋한 삶을 견뎌낸 뒤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오누이는 평안을 되찾는다. (‘양순이 누님’)
‘작가의 말’에서 그는 사생아라는 삶의 조건이 만들어낸 자의식이 황폐한 연애와 걷잡을 수 없는 허무를 강요했고, 마침내 허위의식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제 작가는 깨닫는다. 삶의 부정적인 모습 또한 눈물겨운 자기표현이며 생명의 소중한 에너지라는 것을.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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