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류제석/파리의 '실속' 서울의 '빈속'

  • 입력 2003년 4월 3일 20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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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석
지난 여름 아내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 간 일이 있었다. 평소 말로만 듣던 유럽의 높은 문화수준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호기심에서였다.

부푼 마음으로 파리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호텔의 낡은 시설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우리가 경비를 아끼려고 특급 호텔을 예약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낡은 시설을 보고 같은 호텔비면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좋은 시설을 갖춘 호텔에서 묵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유럽도 이제 별거 아니네 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방으로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한 냉방시설은 없고 창가에 선풍기 하나 달랑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파리의 명물이라는 지하철(메트로)을 탄 뒤 실망은 더 컸다. 사람은 많고 좁아 터진 지하철 안에서 냉방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유럽여행을 먼저 권유했던 아내에게 괜한 짜증을 냈다. 나는 그때 우리나라의 시원하고 쾌적한 지하철과 백화점, 호텔 등을 떠올리며 이제 유럽보다 우리나라가 더욱 경제적으로 발전되었구나 하는 자부심을 느꼈다. 그 뒤 한국에 돌아와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파리의 열악한 사정과 우리의 발전된 모습을 비교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을 한껏 드높이며 떠들어 왔다.

그러던 중 2월 18일 우리는 대구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쾌적하고 시원한 우리의 지하철이 한 줌의 재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뉴스를 통해 내가 비웃던 파리 지하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리 지하철은 결코 불이 번지지 않는다는 실제 실험을 보면서 지난해 파리 시민들을 비웃었던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그리고 파리에서 검소하게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파리 시민들과 거의 빚을 져 가면서까지 명품을 한 가지씩 입거나 갖고 다니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이 동시에 교차됐다. 한때나마 파리 시민들을 얕잡아 보던 그때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류제석 서울 송파구 송파2동·대성학원 국어과 출제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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