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김선태 '동백숲에 길을 묻다'

  • 입력 2003년 3월 14일 19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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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오솔길 하나 있는지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 넘습니다 초입부터 춘삼월 햇빛이 명랑하게 팔짱을 끼는데 어서 오라, 진달래꽃들 화사하게 손목을 잡습니다 오솔길이 만덕산이 품속으로 나를 끌고 갑니다 만덕산이 제 마음속으로 가느다랗게 오솔길을 불러들입니다 산길은 산의 높낮이로 굽이치며 깊어집니다 나도 오솔길을 따라 굽이치다가 잠 깬 계곡의 물소리 만납니다 생각해 보면, 산길은 산의 마음을 따라가는데 나는 무엇을 좇아 어디를 아수라장 헤매었던 걸까요 계곡 물소리는 산의 중심을 깨우며 아래로 흐르는데 나는 또 삶의 어느 주변만을 맴돌다 위로 눈길을 흘렸던가요 관목숲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마음 한켠 잔설처럼 녹지 않는 상처들을 아프게 찌릅니다 길섶에 앉아 쉬자니 문득 풀꽃들이 말을 붙여옵니다 네게도 언제 오솔길이 있었던가, 마음의 뒤란을 느릿하게 휘어도는, 그런 포렴한 오솔길 하나 있었던가 묻습니다

-‘백련사 오솔길에 들다’ 전반부

기상청에 따르면 올 봄 화신은 하루 25㎞ 속도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기슭에 사는 후배가 매화 보러 오라는 전갈을 해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섬진강 가 매화, 아, 그 꽃잎이 하르르 하르르, 흩날리는 사태는 삶의 척추를 죄다 무너뜨립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를 스윽, 하고 지워버리는, 매화 꽃 난분분은 매우(梅雨)라고도 불리는데, 그 꽃비는 치명적입니다. 그 봄 풍경 속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현실로 귀환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김선태 시인이 최근 내놓은 시집 ‘동백숲에 길을 묻다’(세계사)를 펼쳐 들었다가 4년 전, 화개와 광양 사이를 오가며 맞이했던 봄날이 떠올라 잠깐 현기증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김선태 시인이 시 속에서 마주한 봄날은 제가 만났던 봄날과는 판이합니다. 제가 꽃비 속에서 환장했다면, 김선태 시인은 봄꽃 돋아난 산에서 삶의 전모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역광을 받을 때 더욱 화사한 춘삼월 진달래가 손목을 잡아주는 만덕산 오솔길. 시의 화자는 ‘나’와 길을 섬세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만덕산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솔길을 불러들인다는 것이지요. 산과 산길, 계곡과 물의 관계는 조화롭지만, 나와 길, 나와 산, 나와 봄날은 불화하고 있습니다. 마음 한 쪽에 녹지 않고 있는 상처들 때문이지요. 풀꽃이 묻습니다. ‘네게도 언제 오솔길이 있었던가.’

이윽고 오솔길이 끝나는 백련사에 닿을 무렵 ‘기다렸다는 듯 수천의 동백꽃들 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시 속의 화자는 ‘만덕산 정상 백련 한 송이가 화답하듯 빙그레 벙그는’ 모습을 보고, 자기 삶의 국면이 바뀌어져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하산 길에 ‘마음 속으로 오솔길 하나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속의 오솔길 찾기는, 시집 전체에서 꽃이나 파문, 몽돌, 팽이 등 ‘둥근 것’에 대한 성찰로 심화,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 성찰은 다양한 중심에 대한 발견으로 거듭나고, 다시 그 발견을 실천하려는 각오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이 눈부신 봄날, 마음의 뒤란에다 오솔길을 내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오솔길을 걸으며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저기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는 봄날 화신은 그저 ‘관광 상품’에 불과하겠지요.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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