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전한가]<中>어른 키에도 안닿는 비상호출기

  • 입력 2003년 2월 20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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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7시50분경 인천지하철 문학경기장역. 귤현행 전동차에 오른 이미아씨(25·여)에게 출입문 수동 개폐장치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좌석 밑을 두리번거리던 이씨는 한참 후에야 선반 위에 있는 개폐장치를 찾아냈다. 그러나 개폐장치는 키가 1m68인 이씨가 까치발을 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설치돼 손잡이를 돌릴 수는 없었다.

▽허술한 안전기준=서울 2기 지하철(5∼8호선)에는 총 1564량의 전동차가 운행한다. 2001년 제작된 신형도 있고, 이보다 7년 전에 만들어진 1994년식도 있다. 해마다 성능은 향상되지만 안전시설은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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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서울1호선 유독가스 제거시설 全無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동차를 제작하는 ㈜로템(옛 한국철도차량) 관계자는 “발주처에서 주문한 제작시방서에 따라 차량을 만들 뿐”이라며 “안전시설을 개선해 달라는 주문은 수년 동안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에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74년. 그러나 전동차의 안전기준을 법으로 정한 ‘도시철도차량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은 26년 후인 2000년 3월 제정됐다.

이 규칙은 화재 등 돌발상황에 대비해 전동차 내에 소화기, 출입문 수동 개폐기, 기관사에 연결되는 비상연락장치, 비상등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안전규정도 포괄적이고 모호해 안전시설 설치 위치 등이 지하철마다 들쭉날쭉한 것이 현실.

인천지하철의 경우 비상시 승객이 기관사에 연락할 수 있는 호출기도 광고판 위쪽 180㎝ 높이에 달려 있어 어린이나 주부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이용하기 어렵다.

▽화재에 취약한 내장재=도시철도차량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은 큰불을 예방하기 위해 차체와 실내설비는 원칙적으로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재질을 사용하고, 부득이한 경우 불이 쉽게 붙지 않는 ‘난연성’ 재질을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5조원이 넘는 만성적자를 안고 있는 서울지하철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전동차 1량당 45∼50개의 광고판을 설치해 놓고 있다. 광고판의 재질은 종이와 아크릴. 안전규칙과는 달리 방염(防炎) 처리가 안 돼 인화성이 강할 뿐 아니라 불에 타면 독성이 강한 가스를 내뿜는다. 전동차 바닥과 의자 커버, 형광등 커버 등도 어정쩡하게 난연 처리가 돼 있어 화재시 저절로 불이 꺼지기는커녕 더 많은 유독가스를 발생시킨다.

서울도시철도공사 차량처 최정균(崔柾均) 팀장은 “전동차 천장에 스프링클러와 열감지 센서를 설치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겠지만 예산 때문에 매번 검토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승객 1000명에 기관사 1명=제아무리 안전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해도 이를 작동할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 서울지하철 1∼4호선을 제외한 전국의 지하철 전동차에는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차장 없이 기관사 1명만 배치돼 있다. 그나마 서울 1∼4호선 지하철도 2호선을 시작으로 ‘자동열차운전장치(ATO)’를 도입해 단계적으로 차장을 없앨 계획이다.

출퇴근 시간대 전동차 1량에 150명 정도의 승객이 탄다고 계산하면 900∼1500명(전동차 1편성은 6∼10량)의 목숨을 고작 기관사 1명이 책임지고 있는 셈.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때도 두 전동차의 기관사 1명씩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승객들의 안전은 뒤로 밀리고 말았다.

부산교통공단 김모 기관사는 “작년 말 한 승객이 전동차에 타다 문틈에 끼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났지만 한동안 알 수도 없었다”며 “1000명이 넘는 승객의 안전을 혼자서 책임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한양대 서선덕(徐琁德·교통공학) 교수는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지하철 사고에 대비해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일종의 보험”이라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요금을 올려서라도 투자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이재명기자 egija@donga.com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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