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복거일/盧, 손에 흙을 묻혀야 한다

  • 입력 2003년 2월 9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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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현 정권이 몰래 대가를 치렀다는 의혹을 살필 때, 우리는 그 의혹이 정상회담의 준비 단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중요한 것은 회담 자체이지 그것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 따라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마련된 회담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은, 남북한 사이의 특수사정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비현실적이다.

지금 우리 국민은 남북정상회담의 참 모습을 모른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회담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불행하게도, 그 회담이 정상적이 아니었음을 가리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인구에 회자된 ‘55분’, 즉 김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경호원과의 연락을 끊고 북한의 완전한 통제 속에 자신을 두었던 일이 대표적 사례다.

▼'남북 정상회담' 진실 가려야▼

보다 시사적인 것은 북한과 일본의 정상회담이다. 당시 회담을 준비한 일본 관리들은 경험이 있는 우리 관리들에게 자문했고, 그런 자문에 바탕을 두고서 한나절짜리 회담을 선택했다. 그래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북한에서 밤을 지내지 않고 당일 돌아왔다. 평양에서 밤을 지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은 점심도 따로 들었다. 외교사에서 보기 드문 이런 비외교적 행태는 남북정상회담에 관해 뜻있는 얘기를 해준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무게중심은 정상회담 자체에 있으며,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비정상적 거래는 부차적 중요성을 지닐 따름이다. 김 대통령이 정말 마음을 쓰는 것도 바로 정상회담의 방식과 내용일 터이다.

이런 추론은 김 대통령이 이번 대북 비밀송금 사건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김 대통령은 현대그룹의 대북 비밀송금 문제가 방어선을 치기 좋은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송금 문제는 정상회담의 준비단계에서 나온 일이므로 의혹이 정상회담 자체로 번질 위험이 비교적 적은 데다 송금이 순수한 상거래였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자연히 김 대통령은 그 방어선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판세력이 정상회담 자체를 공격하는 사태도 막고 시간도 벌 수 있을 터이다. 이것은 김 대통령으로선 좋은 작전이다. 전략적으로 타당하고, 실행하기 쉽고, 이탈자도 막는다.

그러나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에겐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이번 송금 문제는 다루기에 따라 노 당선자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짐이 될 수도 있다. 처리 방향을 일찍 선택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런 계산을 반영한 듯하다. 문제는 경제적 측면이다.

현대그룹과 채권은행들이 관련되었으므로, 이번 사건은 우리 경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엔론사태 이후 시대(post-Enron era)의 회계 부정은 가장 중대한 경제 범죄가 되었으며, 외국인투자자들이 특히 혐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송금 문제는 이미 금융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의혹을 말끔히 씻어내지 않으면, 새 대통령은 도덕적 기반을 잃어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따라서 경제적 측면에서 현 대통령의 이해와 새 대통령의 이해가 뚜렷이 갈린다.

▼의혹 씻지 못할 땐 새정부 타격▼

노 당선자에겐 이번 사건을 느긋하게 다룰 여유가 없다. 의혹을 씻어내지 않은 채 보내는 하루하루는 우리 경제를 그만큼 더 어렵게 만들고 새 대통령의 치적을 그만큼 줄일 터이다. 노 당선자는 적극적으로 나서 의혹을 씻어내야 한다. 국회에서 잘 처리해달라는 주문은 결국 야당을 통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얘기인데, 그것은 너무 일방적인 계산이다. 야당이 그의 뜻대로 움직일 리도 없지만 그것보다도 멀리 내다보는 전략가인 김 대통령이 세운 계획이 그런 달콤한 꿈을 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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