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중현/인수위의 ‘협조요청’

  • 입력 2003년 2월 4일 20시 13분


코멘트
“재벌개혁의 칼날을 세우고 있는 대통령직인수위가 불러 협조를 요청하는데 ‘못 한다’고 말할 대기업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최근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계획을 짜고 있는 인수위가 일부 대기업에 인천 송도에 조성할 연구개발(R&D)단지 입주를 요청한 데 대해 A그룹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이처럼 실토했다.

인수위는 최근 송도지역에 유치할 핵심업종으로 △디스플레이 △시스템LSI △모바일(통신기기) △자동차 전자부품 △바이오 등 5대 첨단 업종을 선정하고 지난달 28일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수위 관계자들은 요즘 저녁마다 이들 대기업 관계자들과 개별 접촉을 갖고 송도 연구개발단지 입주를 요청하고 있다는 전문이다.

문제는 인수위측의 ‘협조 요청’이 우리의 관행상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강요’에 가깝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인수위 관계자들은 아예 “삼성전자의 기흥연구소, 현대그룹의 경기 마북리연구소 등 주요기업의 핵심 연구기관을 이 지역에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기업들의 입주를 기정사실화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다른 분야도 아닌 연구개발 프로젝트는 우리의 독자적인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분야”라며 “일방적으로 ‘한군데 모여라’는 식은 개발독재시대의 발상”이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서슬 퍼런 새 정부측이 ‘틀’을 짜놓고 기업에 협조를 요청하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줘야 하는 상황은 DJ정부 초기 ‘빅딜 정책’을 밀어붙일 때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더 큰 문제는 인수위가 결코 ‘정부 당국’이 아닌데도 인수위원들이 마치 ‘정책추진자’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미 인천 송도지역을 물류 금융 서비스 중심지로 만들어 외국기업을 유치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재경부측과의 마찰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재계의 걱정이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공약한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이런 모습은 아닐 텐데…”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박중현기자 정치부 sanju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