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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2월 4일 20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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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보고 얘기하면 확실히 정리된 느낌을 준다. 즉흥적인 연설보다 생동감은 떨어질지 몰라도 그만큼 신뢰감을 높일 수 있다. 실제로 원고를 작성하다 보면 주변 의견도 참고하고 여러 차례 생각을 다듬게 된다. 그것은 종이가 주는 차분하고 넉넉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는 안정감 편안함 정리 질서를 상징한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받는 인상도 그런 것이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종이의 차분함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하는 마음에서다. 최근 노 당선자의 행보에서 자신에 대한 주변의 불안감을 씻어주려는 시도를 자주 본다. 이른바 ‘안정 총리’의 선택, 주한미군 방문, 급격한 개혁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 등이 그것이다.
그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엇인가 말하려 할 때는 왠지 나 자신이 조마조마해진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현장 화법’이 신선하게 다가오면서도 저러다 말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요즘 진행 중인 지방순회 국정토론회만 해도 그렇다. 현장분위기에 따라 많은 말을 하는 바람에 오해나 논란거리를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때 그의 옆에 준비된 원고가 놓여 있다면 불안감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감이나 순발력에만 의존하는 정치는 불안하다. 국가 최고지도자라면 말 한마디 잘못했을 때 그것이 가져올 파장을 헤아려야 한다. 그래서 말을 아껴야 하고, 하더라도 원고로 정리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 당선자와 그 진용이 인터넷을 사실상 ‘정치도구’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종이문화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인터넷의 편의성에 함몰되다 보면 감정적 일방적 선동적 배타적인 인터넷의 특징이 정치 행위에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 오프라인을 상징하는 종이는 그런 온라인의 역기능을 줄여 주고 사람을 사색하게 하는 고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세대’의 새로움과 빠르기에 못지않게 ‘종이세대’의 경륜과 지혜가 소중하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무슨 일이든 심사숙고하고 한발 늦더라도 차근차근히 가라는 주문이다.
종이업자들이 상품(上品)으로 치는 종이는 이런 것들이라고 한다. ‘거칠지 않고 매끄러우며 정확하게 앞뒤의 구분이 되는 것,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 너무 얇지 않고 찢어지지 않는 보존성을 지닌 것.’ 노 당선자가 종이를 가까이 하면서 이런 점까지 그대로 닮았으면 좋겠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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