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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27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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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상파 TV 방송시간은 정치 사회적 환경의 변화 속에 줄었다 늘었다를 되풀이해 왔다. 60년대에는 방송기술의 한계와 경제사정으로 하루 5시간 안팎 방송됐고, 70년대는 세계적인 석유파동으로 아침방송이 폐지되는 등 크게 축소됐다. 80년대에는 정치적 요인과 아시아경기대회, 올림픽 특수로 대폭 늘어났다. 90년대에 와서는 ‘연장과 확대’ 바람이 불면서 오늘날과 같은 ‘1일 16시간 체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가급등속 에너지 낭비 우려▼
지금 지상파 TV의 방송시간 연장을 둘러싸고 방송사와 시민단체,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신문업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방송협회의 요구대로 3월부터 방송시간을 하루 3시간씩 연장해 주고 1년 뒤부터는 완전 자율화해야 하느냐를 놓고 찬반 의견이 팽팽하다.
원칙론의 입장에서 보면, 방송시간은 방송사 자율로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방송시간의 연장은 ‘신문의 증면’과 같이 표현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TV 방송시간의 확대에는 긍정적 효과도 없지 않다. 첫째, 독립제작사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게 된다. 둘째, 광고의 기회가 늘어나 산업활성화에 기여한다. 셋째, 외국의 위성방송에 대응하는 전일제(全日制) 방송으로 문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넷째, 정보-문화 프로그램을 확충해 국민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다섯째, 방송사의 수익 확대는 시설과 인력보강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방송시간만 늘린다고 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방송시간 연장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려와 비판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는 부정적 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역사적 경험에 비춰보면 이러한 우려는 사실로 드러난다.
첫째, 프라임 시간대에 오락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교양 정보 프로그램은 낮 시간이나 심야 시간으로 밀려나게 된다. 둘째, 심야에 퇴폐적인 프로그램이 집중 편성될 수 있다. 셋째, 늘어나는 시간에 비례해 함량미달 프로그램이 양산될 가능성이 높다. 넷째, 지상파 TV의 영향력이 더욱 늘고 시장 과점 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다섯째, 재방송이 늘어나고 손쉬운 스포츠 프로그램을 과다 편성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방송시간의 연장이 필요한가. 한마디로,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선 임기 말 ‘선심행정’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방송위원들의 임기가 불과 2주 남은 상태에서 주요 정책을 졸속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또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임박하면서 국제 유가가 연일 급등해 에너지 대책에 비상이 걸린 마당에 TV 방송시간 확대라는 에너지 소비촉진책을 쓴다는 것은 시의 적절치 못하다. 아울러 방송시간 확대는 프로그램의 질 저하를 가져오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 앙코르방송, 방학특선 등의 미명 하에 재방송이 적지 않게 편성되고 있는데 방송시간의 확장은 재탕 삼탕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다. 더구나 ‘지상파 TV 동시 재송신’을 둘러싸고 지금 케이블방송, 지상파 TV, 위성방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지상파 TV의 독점을 심화시켜도 좋을까. 매체간의 균형발전이 아쉽다. 특히 지상파 TV의 광고독점은 활자매체와의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크다.
▼수익지상주의 풍토 개선부터▼
불량식품이 우리 몸을 해치듯 ‘황무지’ 같은 유해 프로그램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좀먹는다. 방송 경영자들은 오늘날 우리 방송이 ‘청소년의 사표’로서, ‘국민의 교사’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지난해 KBS의 순익이 1400억원이라고 한다. 이 중 콘텐츠 개발이나 인력 양성, 방송문화 연구에 쓴 돈이 과연 얼마였는가.
외부 간섭을 막고 자율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엄격한 자율규제의 양식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방송시간 연장을 수익 수단으로 인식하는 한, 방송의 공영성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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