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눈물을 닦아요

  • 입력 2002년 12월 30일 18시 10분


23년 전 가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심복이 쏜 총탄을 맞고 돌아갔을 때 그는 울었다. 그후 그는 민정당에 들어갔고 민자당과 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에 이르는 동안 중진 정치인이 되었다. 당의 여러 요직을 거쳤고 총재 측근으로 활약했다.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눈물을 흘리던 날 그도 따라 울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쏟기 전에 알았어야 했다. 그가 진정 후보를 도우려 했다면 진작 후보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했다는 것을.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그는 억울할 것이다. 당과 후보를 위해 전력을 다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세상이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많은 국민이 5공, 6공, 양김(兩金) 정권을 거쳐온 자신의 얼굴을 계속 보는 데 신물을 낸다는 걸 알아야 했다. 자신의 식상한 이미지가 후보의 이미지까지 수구로 몰아간다는 걸 눈치채야 했다. 아무리 후보가 개혁과 변화를 이야기해도 그가 옆에 붙어 있는 한 색이 바래는 걸 깨달아야 했다. ‘그’가 어디 특정인사뿐이겠는가. 한나라당 지도부라면 혹시 내가 ‘그’가 아닐지 돌아볼 일이다. 한 중진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5년간 우리 당이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기보단 정권의 발목을 잡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보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당을 개혁하려면 인적 교체보다 생각을 먼저 바꿔야 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꾼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설령 생각을 바꾼다 한들 이미지 전환까지 가능할까. 이는 비단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의 고민만이 아니다. 승자인 민주당이라고 한 치도 다를 게 없다.

민주당의 조순형(趙舜衡) 상임고문 등 ‘친노(親盧) 개혁파’ 의원 23명은 얼마 전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당의 ‘발전적 해체’를 요구했다. 한마디로 기존의 당권파는 이제 그만 뒷방으로 물러나라는 얘기다. 격렬한 논란이 일었고 한화갑(韓和甲) 대표는 그예 눈물을 보였다. ‘애타게 당을 지켜온’ (그렇다고 자부하는) 한 대표로서는 실로 분하고 서운한 눈물이었을 게다.

졸지에 당의 주류에서 밀려난 동교동계 처지도 딱하다. 호남 유권자들이 DJ를 보고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고, 그것이 노 후보 승리에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생각하는 동교동계로서야 민주당 덕본 건 없다는 개혁파가 괘씸하기 짝이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다툼이란 변화의 큰 흐름에선 곁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큰 흐름이란 민주당은 개혁돼야 하고 동교동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정당은 지극히 무력했다. 원내 제1당으로 정당 지지도에서는 줄곧 앞서 있던 한나라당은 자기당 후보의 당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노 후보가 민주당에 힘입어 승리했다고 볼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선 이래 민주당은 자중지란 속에 줄곧 자기당 후보 끌어내리기에 급급했다. 후보단일화를 앞세워 우르르 떼지어 탈당을 하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정풍(鄭風)’에 매달렸다.

▼피할 수 없는 ´세대 정치´▼

노 후보의 승리는 역설적으로 ‘탈(脫) 민주당’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민주당 내 ‘노무현 끌어내리기’가 민주당을 싫어하는 유권자의 선택을 자유롭게 한 셈이다. 동교동계가 주장하는 ‘DJ를 보고 몰아줬다’는 호남 몰표의 성격 역시 오히려 ‘반(反) 한나라당’에 가깝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DJ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 후보가 싫어서’라는 것이다. 몰표의 표면상 결과는 전과 같으나 그 내용이 다르다면 동교동계가 목청을 높일 계제는 아닐 것이다.

민주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정당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이번 대선의 중요한 교훈이다. 5년은 길지 않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부단히 쇄신하지 못하는 정당, 정치인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20대의 절반이 5년 후에는 30대가 되고 30대의 절반은 40대가 된다. 피할 수 없는 ‘세대 정치’의 흐름이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를 갈망한다.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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