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외신]<3>일 유적발굴 사기극 후지무라

  • 입력 2002년 12월 11일 17시 53분


후지무라 신이치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 구석기 시대 유물을 조작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동아일보자료사진
후지무라 신이치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 구석기 시대 유물을 조작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동아일보자료사진
‘구석기 발굴 날조 판명된 사사라기(座散亂木) 유적지, 국가 사적 지정 해제.’

11월 16일 일본 몇몇 일간지의 사회면 한 모퉁이에 짤막하게 실린 기사 제목이다.

한때 ‘60만년 전 원인(原人) 유물 발견’이란 제목으로 도쿄(東京) 동북부의 미야기(宮城) 현 사사라기 유적지를 1면 머리기사로 소개했던 언론매체들이 사적 지정 해제 소식은 고작 1단 기사로 취급한 것.

어쨌든 20여년간 발굴만 하면 몇만년, 때로는 몇십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사유물이 쏟아져 나와 ‘신(神)의 손’으로 불렸던 도후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51) 부이사장이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공식 퇴출됐음을 알리는 기사였다.

그가 사사라기 일대에서 4만수천년 전 석기를 발굴한 것은 1981년. 당시까지 일본 최초의 인류 출현시기는 3만년 전이었기에 실로 획기적인 성과였다. 그는 이후 다른 곳에서도 속속 선사시대 유물을 찾아냈고 끝내 일본 최초인류가 60만년 전 출현했다는 그의 학설이 버젓이 역사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사사라기 일대는 199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마이니치신문의 추적 끝에 후지무라가 다른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땅에 파묻는 모습이 2000년 11월 ‘몰래 카메라’에 잡혔다. 20년에 걸친 그의 사기극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고백과 재조사를 통해 무려 200여개의 유물이 조작됐음이 밝혀졌다.

고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워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에 나선 그는 조작을 통해 명성을 얻은 뒤 더 큰 명예욕과 발굴비 확보에 눈이 멀어 버렸던 것.

희대의 조작극이 발각된 뒤 곧바로 고고학협회에서 제명된 그는 “마(魔)가 낀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는 조작극이 명백히 드러난 지 2년이 흐른 뒤에야 날조된 역사를 공식 정정했다. 불과 20년간 통용된 잘못된 역사기록을 바로잡는 것만 해도 이처럼 쉽지 않다.

일본의 역사 날조는 한국사와 관련된 것만 해도 고대사 분야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이나 광개토대왕비 비문 해석, 근현대사 분야에서는 강압성이 없다고 우기는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실체를 부인하고 있는 군위안부 동원 등 숱하다.

일본의 고대사 조작이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짧은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근현대사 조작은 제국주의 광풍에 휩쓸린 ‘광기(狂氣)의 시대’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구석기 유물 날조 과정을 지켜보면서 후지무라 개인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연치 않은 발굴 과정에도 고개만 갸웃거렸을 뿐 용기 있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조사대원들과 동료학자, 그리고 발표자료를 베끼기에 바빴던 일본 언론, 모두가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상호비판이 없는 사회는 진실보다 허위가 위세를 떨치고 급기야 역사 날조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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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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