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외신]<2>체첸망명정부 특사 자카예프

  • 입력 2002년 12월 10일 18시 15분


“누구보다도 무대를 사랑하는 내가 뮤지컬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이라고 지시했겠는가?”

‘도망자’답지 않게 단정한 모습으로 유럽 각 국을 돌아다니며 체첸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있는 아흐메드 자카예프 체첸 망명정부 특사(43·사진). 연극배우 출신인 그는 자신이 10월 체첸반군이 저지른 모스크바 문화궁전(돔쿨트르이) 인질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데 대해 최근 이같이 반박했다.

‘국제테러범’으로 러시아 당국의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는 그의 운명이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11일부터 영국 런던법원에서는 자카예프의 러시아 송환에 대한 첫 심리가 열린다. 9일 러시아 검찰이 영국 정부에 송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은 국제테러조직인 체첸반군에 가담한 자카예프가 이번 인질사건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1994∼96년에는 직접 테러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달 덴마크에도 송환을 요구했으나 덴마크 법원은 “그가 테러범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러시아 정부는 “자카예프는 공개 재판을 받을 것이며 절대로 그를 처형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나 국제사면위원회(AI) 등 국제인권단체들은 그의 송환에 반대하고 있다. 영국의 여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 서방 문화예술인들까지 자카예프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러시아 명문 예술학교인 국립연극대 출신으로 체첸 드라마극장에서 햄릿 역을 도맡던 인기 배우에서 반군 지도자로 변신한 자카예프의 인생에는 비극적인 체첸 현대사와 고단한 체첸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1940년대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세프 스탈린이 수십만명의 체첸인을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반(反)소련 감정과 민족주의를 가슴속에 키워왔던 자카예프는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모스크바에서 연극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체첸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내기도 한 그는 1994년 러시아군의 체첸침공이 시작되자 무대를 버리고 직접 총을 들고 반군에 가담했다.

자카예프는 체첸반군 내에서 러시아와의 대화를 통한 정치적 해결을 주장해온 ‘온건파’로 지금까지 러시아 정부와의 협상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난해 9·11사태 이후 미국이 대(對)테러전에 나서자 체첸 사태에 대해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러시아 정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를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를 통해 수배하고 체포에 나섰다.

망명길에 오른 그는 국제법상으로는 엄연히 러시아 시민. 그러나 그는 러시아여권 대신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옛 소련의 여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 출신으로 남미의 혁명지도자였던 체 게바라처럼 ‘카프카스의 체 게바라’로도 불리는 자카예프. 그가 연극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는 그날은 오랜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체첸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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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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