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북한의 ´카드 돌려막기´

  • 입력 2002년 11월 26일 18시 34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의 의미는 북한을 염두에 두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특히 올해 하반기에는 북한에서 무슨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촌수가 먼 혈육이 있다고 치자. 천부적 인연 때문에 멀리할 수는 없지만 주기만 하는 관계가 부담스러워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보통사람의 처세술이다. 그에게서 소식이 오면 십중팔구 “상황이 급박하니 좀 도와달라”는 하소연이다. 그래서 소식이 없으면 그의 형편이 궁금하기는 해도 일부러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한’ 연인 사이가 아니니 탓할 수도 없다.

올해 북한이 보내온 소식은 대부분 무소식만 못한 불길한 뉴스였다. 노다지를 발견한 것처럼 요란하던 소식마저 점차 같은 민족인 우리의 걱정거리로 변하고 있다. 경제개선조치(7월1일), 북-일 정상회담(9월17일), 신의주특구 개발계획(9월19일), 핵개발 시인(10월4일), 지뢰제거 검증 거부(11월24일), 금강산특구 지정(11월25일) 등이 그런 소식들이다.

북한이 소식을 남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분석은 가능하다. 필자의 눈에는 북한이 살아남기 위해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돈이 나올 만한 곳이면 어디든 찔러보고 있다. ‘위대한 영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체면 불구하고 침략자였던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에 대해 사과하고, 정체도 잘 모르는 외국인 사업가 양빈에게 신의주 땅을 통째로 넘겨주려다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떼를 쓰면 넘어가는 남한 정부에는 개성공단과 금강산특구를 미끼로 내밀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미국에는 관계개선을 하지 않으면 핵무장도 불사한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일관성도 없지만 어딘가에서 돈이 나오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북한 특유의 무모함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급할 것 없는 전주(錢主)는 돈에 쪼들리는 북한의 형편을 쉽게 간파한다. 미국과 일본이 금고 문을 잠근 채 꿈쩍 않는 것은 흔히 파산 아니면 끔찍한 범죄로 끝나는 카드 돌려막기의 결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이 떼를 쓰고, 애를 태우고, 위협할 때마다 뭔가를 지원하곤 했던 남한 정부는 아직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대표작 ‘어린 왕자’에서 ‘길들이다(apprivoiser)’라는 단어를 통해 우정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길들이기는 어린 왕자와 여우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과 야수가 먼저 사이좋은 이웃(voisin)이 되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은 햇볕정책으로 북한 길들이기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웃이 되려고 했으나 북한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문제는 곧 등장할 새 정권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다. 과연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물론 북한이 파산이나 범죄의 길로 빠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또다시 무모한 길들이기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 그에 앞서 북한이 과연 이웃으로, 피를 나눈 민족으로 돌아올 것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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