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75…바람속의 적①

  • 입력 2002년 11월 17일 17시 26분


부산 공설 운동장의 그늘진 곳은 서릿발에 흙이 들려 있고, 양지바른 곳은 눈이 녹아 질퍽거린다. 학교나 회사 등 소속 별로 줄 서 있는 선수들의 입김이 하얗게, 마치 입으로 깃털을 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상남도 각지에서 모여든 선수들은 발을 동동거리며 추위를 참다가, 감색 양복 차림의 조선 체육회 회장이 단상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발꿈치를 모으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엄숙한 표정으로 단상에 오른 회장은 오른 발을 뒤로 내밀고 몸을 빙글 돌려 기름진 목에 주름을 잡고 일장기를 올려다보았다.

“우향 우, 천황폐하께 경롓!”

대회 위원장이 구령을 붙이자 운동장에 있는 체육회 위원들과 선수들을 비롯하여 관람석에 있는 선수들의 가족과, 오징어 땅콩 등을 담을 상자를 목에 걸고 팔러 다니는 아이들까지 모두 일장기를 올려다보며 경례를 했다.

“국가 제창!”

기미가요와(우리 천황의 시대는)

치요니야치요니(천세 만세)

사자레이시노(조약돌이)

이와오토나리테(바위가 되어)

코케노무스마데(이끼가 끼도록)

하얀 무명 셔츠에 하얀 바지 차림의 선수들 속에 한결 눈에 띠는 차림의 소년이 있었다. 우철은 89번 번호를 단 빨간 러닝 셔츠 위로 튀어나온 목을 돌려 기둥에 매달린 깃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장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펄럭이고 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릴 테니까 맞바람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긴장을 풀고 싶은데, 너무 추워서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이 자식 다리가 제법인데, 허벅지 뒤 근육이 불룩불룩 경주마 같다, 꽤 빠르겠지, 그런데 너무 마른 거 아닌가, 춥다! 전부 몇 명이나 될꼬? 삼 백 명? 아니 더 되지 싶다, 오 백 명? 이렇게 추운데 셔츠 바람인 선수들을 세워놓고 장광설이라, 어떻게 된 거 아이가, 확성기 상태가 나빠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 춥다 추워! 발을 구르다 서릿발이 뭉개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기고 싶다는 욕망이 귓전까지 밀려 올라왔다. 달리고 싶다! 지금 당장! 빨리 출발선에 서고 싶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우철은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배꼽 주위에 두 손을 대고 심호흡을 했다.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큐우 파아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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