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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30일 16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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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모스크바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이다 죽음을 맞은 18명의 체첸 여전사들이 보여준 '원한과 증오'의 행각이 다시 한번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미국 ABC방송 인터넷판이 29일 보도했다.
전체 50명의 인질범 중 18명에 달하는 체첸 여전사들은 머리에서 발 끝까지 검은색 이슬람 의상으로 온 몸을 감싼 채 폭발물을 두르고 자살 특공대로 인질극에 가담, 세계를 경악시켰다.
여성 인질범들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죽은 체첸 반군의 부인들로, 공포에 떨고 있는 인질들에게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열망은 인질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며 불타는 분노와 증오심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구출된 인질들은 여성 전사들이 인질범들 중에서도 특히 공격적이었다고 증언했다.
73세 노모와 함께 극장에 인질로 잡혔던 한 여교사는 일간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와의 인터뷰에서 인질극 당시 아픈 노모의 약을 구하기 위해 한 여성 인질범에게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며 간청했으나 그녀는 매정하게 외면했다고 전했다. 스브예타라는 여성 인질범은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며 "다시 자리를 뜨면 죽여버리겠다"고 냉담하게 대꾸했다고 이 여교사는 전했다.
또 다른 인질범은 그에게 "너는 지금 이순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지난 10년간 힘든 나날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미국 버지니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테러리즘 연구센터의 한 연구원은 "보수적인 체첸 사회에서 여성 전사들이 최전선에 나선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지상의 지옥(hell on Earth)'으로 불리는 체첸에서 비운의 현대사가 시작된 것은 1994년 러시아가 체첸 이슬람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면서부터. 고문과 실종, 약식 처형 등 러시아군에 의한 인권유린이 자행되면서 체첸 여성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의 한 관계자는 "많은 체첸 여성들은 남편과 아버지, 형제들을 잃었으며 사라진 남편과 아버지 등을 찾아나서는 한편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왔다"고 말했다.
체첸에서 활동중인 심리학자 케다 오마르카드지예바는 "여성 인질범들은 아마도 가족들이 러시아군에 의해 잔인하게 처형된 사람들일 것"이라며 "십년간 지속된 무법천지에서 쌓인 무력감과 스트레스가 폭력적인 반응을 촉발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모스크바 극장의 붉은색 좌석 위에 폭탄을 두른 채 쓰러져간 체첸 여성 인질범사건은 지난 수 년간 지속된 체첸 사태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ABC 방송은 덧붙였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