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번호만 알면 통화-위치 도청

  • 입력 2002년 10월 25일 06시 38분


불법도청이 위험 수위를 넘어 범람하고 있다. 도청과 편법적인 감청이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뿐만 아니라 재계와 언론계 인사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항간의 설(說)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폭로한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과 대검찰청 이귀남(李貴男) 범죄정보기획관 사이의 전화통화 내용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도감청 방식〓도감청 기술은 유선과 무선을 가리지 않는다. 유선전화는 전화선이나 교환기의 단자를 통해 도감청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 장기간 특정 전화를 도감청할 때 사용되지만 이 방식은 외부인에게 도감청 사실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 최근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대신 최근에는 무선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도감청 방지업체 관계자는 “유선전화선 잭에 초소형 무선송신기를 넣어 통화내용을 외부로 송출하는 무선도청기가 판매되고 있다”며 “무선송신기를 이용하는 방식은 발각되더라도 ‘설치자’의 신원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도감청자들이 선호한다”고 말했다.

휴대전화의 경우 장비가 고가이긴 하지만 대상자에게 도감청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 특히 휴대전화는 통신사업자를 통해 실시간으로 ‘위치 파악’이 가능해 대상자가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추적할 수 있다. 휴대전화의 위치추적은 서울의 경우 오차가 수백m에 불과해 범인 검거에도 활용되는 기술. 일부 정치인들은 이 때문에 은밀히 움직일 때는 휴대전화에서 배터리를 빼는 방법으로 위치추적을 피하고 있다. 단순히 전원만 꺼놓을 경우에도 위치추적의 대상이 된다는 것.

▽첨단화된 무선 도청기술〓휴대전화 도청은 단말기에서 송신된 전파가 기지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인터셉트’하는 방식이 주류.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24일 “휴대전화 도청 가능성을 놓고 논란이 있어 왔지만 번호만 알면 도청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라고 못박았다. 이는 전화번호와 제품일련번호(ESN)를 알아낼 경우 단말기∼기지국의 암호화된 무선통신 내용을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에서 개발된 휴대전화 도청장치도 이 점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휴대전화는 사용자 인증을 위해 가입자번호(MIN)와 ESN을 조합한 뒤 이를 토대로 통화내용을 암호화하고 있다. 국내에서 사용중인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휴대전화 통화방식은 기지국의 한 채널로 수십명이 동시 통화할 때 특정인의 통화내용을 찾아볼 수 있도록 암호신호를 씌우고 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 암호체계가 도중에 해독되는 허점이 발견됨에 따라 또 다른 암호를 개별 단말기에 부여해 도감청 방지에 나서고 있다.

▽국가기관에 의한 도청 실태〓24일 취재팀이 만난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국정원이 보유한 도청용 장비 50대가 동시에 가동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이 도청장비 운용의 실체를 간접 시인했다.

반경 1㎞ 이내의 모든 휴대전화 통화내용을 들을 수 있는 이들 도청장비는 미국의 CSS사가 만든 ‘G-COM 2056 CDMA’ 제품으로 007가방 크기의 휴대용으로 알려졌다.

이 도청장비는 대상자 전화번호를 최대 1000여개까지 미리 입력할 수 있으며 동시에 최대 64채널까지 도청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휴대전화 도청장비는 대상자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두면 해당 휴대전화가 발신 또는 수신할 때 자동 감지한다.

▽휴대전화 도청장비 국내 유입〓국내 보안업체 및 정보통신업체들은 미국산 휴대전화 도청장비가 이미 국내에 도입돼 국가기관에서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도청탐지업체인 국내 A사의 한 간부는 “국정원이 아닌 또 다른 국내 정보기관 직원으로부터 이 기관이 10대 정도의 미국산 휴대전화 도청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대당 가격이 30만달러를 넘는 고가여서 국가기관이 주수요자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보안업체 B사의 김모 사장(40)은 “도청방지장비도 이미 국내에 도입됐다”고 덧붙였다. 이 회사에는 하루 20∼30명의 정치인 등이 도청방지장비 구입을 문의하고 있다고 했다. 이진구기자sys1201@donga.com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김선우기자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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