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암 수술을 마치고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대표작 ‘토지’를 악착같이 써내려 가면서 겪었던 삶에 대한 심경을 그 책 서문에 적은 구절이다. 우리에겐 유사한 심경을 느끼게 하는 삶의 기로들이 다가온다. 삶의 목표와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앞에 오는 난관은 육체적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문화적 환경적 장벽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힘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실수를 한 선수가 심한 질책을 받고 울었다. 이 모습을 본 감독이 강하게 말했다. “야구에 울음은 없다!(There is no crying in baseball!)”
야구뿐 아니라 인생사에 있어서도 모욕이나 고난 앞에 쉽게 무릎 꿇지 말고 할 일을 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 말은 미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영화 속 명대사로 꼽힌다. 미국 영화 명대사 100선 안에 들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92년 개봉했던 톰 행크스, 지나 데이비스, 마돈나 주연의 ‘그들만의 리그’다. 1943년부터 1954년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미국 최초의 여자프로야구리그 ‘올아메리칸걸스 프로야구리그(AAGPBL)’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주요 선수들이 전쟁에 나가는 등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미국 야구계는 팬들의 눈길을 계속 야구에 묶어 두기 위해 여자프로야구를 출범시켰다. 여자 선수들은 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한 채 경기에 나서고, 여성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경기했다.
야구 본고장 미국에서도 야구는 전형적인 남성 스포츠로 인식돼 왔다. 여성들도 1800년대부터 야구를 했지만 여성들은 좀 더 큰 공과 언더핸드 피칭을 하는 소프트볼 쪽으로 주로 진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자는 소프트볼에 어울리고 야구는 남자에게 어울린다는 사회적 인식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미국 스포츠 연구자들은 분석한다. 최근까지도 미국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서 여자 야구를 하는 선수들은 극소수였고 관련 시설과 제도적 뒷받침도 허약했다.
영화 ‘그들만의 리그’는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그 당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뚫고 차별과 무시 속에서도 여자 선수들이 야구를 통해 자신의 성취를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정과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더 중시했던 이들이 야구 선수로서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눈을 뜨고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는 여성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온갖 사연과 개인적 갈등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9회말 투아웃 이후 마지막 대결로 압축되는 과정과, 라이벌 선수 간의 충돌이 대폭발하는 결말 부분은 삶 속의 갈등과 투쟁을 숨 막히는 야구 경기에 빗댄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미국 여자프로야구는 전쟁에서 남성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남자 경기에 팬들의 눈길을 뺏기고 수익이 줄어들면서 해체됐다. 그 이후 여자 야구는 오랫동안 더 짙은 그늘 속에 잠겼다. 미국에서 축구 농구 배구 골프 등 소위 메이저 종목 중에서 야구만 여자 프로리그가 없었다.
그랬던 미국 여자 야구가 올해 72년 만에 여자프로야구리그(WPBL)를 부활시킨다. 8월부터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등 4개 팀이 참가해 7주간 리그를 펼친다. 단기 리그이고 선수들의 연봉도 적지만 여자 프로리그가 독립할 수 있는지를 시험받는다. 전 세계에서 선수들을 모았고 국가대표 포수 김현아(보스턴) 등 한국 선수 4명도 참가한다. 한국 여자 야구는 미국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 있다. 프로는 물론이고 실업팀도 없는 상태이고 선수들은 늘 생계 걱정을 한다. 그러나 미국 프로야구 관중의 39%, 한국 프로야구 관중의 55%가 여성 팬인 상황에서 여성들의 야구 진출은 결국 시대적 흐름이 될 수밖에 없다. WPBL 출범은 이 흐름을 반영한 결과다.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여자 야구 선수들은 기존의 사회적 선입견과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으려 노력해 왔다. 숱한 난관을 극복해 온 이들의 모습은 마치 ‘야구에 울음은 없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각인해 온 것처럼 꿋꿋하다. 그들이 프로리그를 성공적으로 출범시키고 유지한다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그들 자신의 리그’가 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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