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용덕/구렁이 담 넘는 ´公자금´

  • 입력 2002년 9월 24일 18시 15분


관료제에 의한 행정이 올바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견제하고 감독할 의회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관료제를 인류가 창안해낸 가장 합리적이고 근대화된 국정관리 방식인 것으로 칭송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의 주장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금년 정기국회의 의제 가운데 하나로 잡혀 있는 공적자금 국정조사가 좌초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집권 행정부와 민주당의 비협조로 인해 국정조사가 여의치 않을 우려가 높기 때문에 차라리 차기 정부에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한나라당의 보이콧 움직임 때문이다.

▼여야-정부 짠듯이 흐지부지▼

공적자금은 김대중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핵심 지렛대로 사용해 온 경제정책 수단이다. 그동안 무려 152조원이라는 가히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이 동원되고 배분되었다. 이 방식을 통해 집권 행정부는 거의 과거 ‘개발 연대’에 필적할 만한 시장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공적자금 문제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는 그 운영과정에서 권력형비리가 있었는지 여부를 가리는 수준을 넘어, 집권 행정부의 지난 5년간 경제정책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8월 재·보궐선거로 제1 야당이 의회의 반수가 넘는 139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 다른 정당에 의해 행정부와 국회의 집권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가 형성되었다. 80년대 말 제13대 국회에서도 잠시 여소야대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는 3개 야당의 연합에 의해서만 과반수 확보가 가능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의회정치사에서 현재와 같이 국회가 제몫을 다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없었던 셈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미국이나 프랑스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분점정부가 때로는 역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지나친 대 행정부 견제와 간섭으로 인해 국정운영에 비합리성과 차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행정부에 의해, 좀더 구체적으로는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해 독단적으로 국정이 좌우되어 온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분점정부의 형성은 국회가 모처럼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분점정부의 형성은 국회가 좀더 국정 운영의 중심에 서서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독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달라는 국민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금년 가을 정기국회는 김대중 정부 5년을 평가하고 차기 행정부의 운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현 집권 행정부에 대한 흠집내기의 차원을 넘어, 앞으로 국회가 명실공히 국민의 대의기구로서 국정운영의 중심에 접근하는 제도화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행 중인 국정감사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번 분점정부에서도 여느 때 국회와 별 차이가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오히려 대선을 앞둔 시점 때문인지, 국정에 대한 내실 있는 감사는커녕 파당적인 정치성 질문과 말싸움이 더 주를 이루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근에 모처럼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기 시작한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

▼국회서 철저하게 규명해야▼

공적자금에 대한 국정조사가 대선을 눈앞에 둔 여야의 당리당략에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관해서는 일반 국민이 확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경제정책으로서 이 문제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임에 분명하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의 거의 1.5배에 이르는 대규모 자원의 배분이 이루어진 사안에 관해 예산국회에서 다루지 않고 차기정권으로 넘기는 것이 당리당략에 얼마나 더 실익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분점정부의 제1당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 집권 행정부와 여당의 자료 미비 등 비협조 때문이라는 궁색한 이유는 제1당 단독으로도 과반수를 확보한 현재의 국회에서 가당치 않은 핑계에 불과하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인위적 ‘정당정책’에 의해 소수 의석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역대 야당들의 대여 투쟁을 상기해 보면 될 것이다.

만일 야당과 여당이 이런 저런 핑계로 공적자금 문제를 비롯한 정기국회의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를 이처럼 소홀히 한다면, 이는 마치 13대 국회의 여소야대가 ‘3당 합당’으로 이내 국민의 뜻을 저버린 사건에 필적하는 직무 유기요 배신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프랑스처럼 ‘동거정부’는 아닐지라도 분점정부는 여야가 모두 국정운영에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용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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