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노후보, 주워담으려면 말을 말라

  • 입력 2002년 9월 12일 18시 34분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의 말은 천금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따르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행동준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이 무게를 가지려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말을 해야 하고, 불가피한 사정 변경이 없는 한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 더욱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지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생각은 물론 외교관계나 국익까지 헤아려 말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9·11테러 1주년인 그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가 영남대 강연에서 “미국에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주의자면 어떠냐”고 말한 것은 여러 면에서 부적절했다. 시기도 그랬고 내용도 그랬다. 그는 곧바로 “말을 하고 보니 반미주의자는 좀 그렇다. 대통령이 반미주의자라면 우리 국익에 큰 손해를 끼칠 것이다”며 한 걸음 물러섰지만, 우리는 이 점이 더욱 당혹스럽다.

노 후보가 젊은 학생들이 가득 찬 강연장 분위기에 취해 불쑥 ‘반미’ 얘기를 꺼냈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얼른 말을 주워담았다고 해도 사려 부족이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그는 이날도 ‘나는 본래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런저런 문제가 있으니 여러분들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식의 화법을 구사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는 지난 주말 한 사회단체 강연에서도 “개인적으로 서울대를 없애는 것에 찬성한다”고 말한 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신문에 크게 실리기 때문에 없애겠단 말은 하지 않겠다”고 덧붙인 적이 있다.

이런 식의 화법은 듣는 이를 조롱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노 후보는 말을 가려 해야 한다. 얼마 가지 않아 주워담을 말이라면 아예 삼갔으면 하고, 정말 해야 할 말이라면 분명히 했으면 한다. 정치지도자의 말이 가벼워 바람에 날리듯 하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지금 노 후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말의 안정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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