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따라하지마, 다쳐”…금융상품도 특허시대

  • 입력 2002년 9월 9일 18시 31분


국민은행은 지난해 2월 국내 처음으로 ‘맞춤형 정기예금’을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정기예금이란 일정 금액을 일정기간 예치해 놓는 것. 그러나 ‘맞춤형 정기예금’은 일정 횟수에 한해서는 고객이 자유롭게 입출금을 할 수 있다.

고객의 입맛에 따라 ‘틀’을 벗어버린 이 상품은 판매 1주일 만에 수탁고 1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5개월 뒤에는 ‘단일 상품 최단기 최고 판매기록’으로 ‘한국 기네스 인증서’를 받았다.

국민은행의 성공을 다른 은행들이 바라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4월 초 우리은행이 ‘모아정기예금’을 내놓자 ‘자유자재정기예금’(산업) ‘다기능정기예금’(기업) ‘프리스타일 정기예금’(한미) 등 은행마다 유사상품을 내놓았다.

결국 맞춤형 정기예금은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지 반 년도 되지 않아 은행권 ‘공동상품’이 돼 버렸다.

그러나 이것도 옛말. 이제 무분별한 베끼기는 불가능하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12월 ‘신상품 배타적 우선판매권’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은행 보험 증권 투신 등 금융회사가 신상품을 개발하면 심사 후 1∼6개월간 독점판매권을 준다.

금감원 양현근 금융지도팀장은 “새 상품이 나온 지 1주일도 안 돼 유사상품이 나올 정도로 금융권의 베끼기 관행이 심각했다”며 “우선판매권 제도는 신상품 개발 의욕을 북돋아 금융산업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상품의 ‘특허시대’〓8월 말 현재 일정 기간 독점판매권을 받은 금융상품은 은행권 3건, 증권사 7건, 보험사 1건, 투신 5건 등 모두 16건. 증권과 투신업계가 이 제도를 활발히 이용했다.

특히 한국투신과 한국투신운용은 각각 3건과 2건의 ‘특허권’을 받아 실적이 돋보였다. 지난해 9월 19명의 인원으로 출범한 금융상품연구소 덕택이다.

금융상품연구소 최인규 실장은 “앞으로는 한국도 ‘금융상품의 붕어빵’ 시대에서 벗어나 금융상품의 경쟁력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때가 된다”고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다양한 채널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투신은 7월 전국의 대학에 금융상품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지금은 아이디어가 상품화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단계.

외환관리에 강점이 있다고 자부하는 외환은행은 2월 외환사업부 내에 외환신상품팀을 신설했고 7월엔 ‘특허권’을 받아냈다.

이종면 부부장은 “배타적 판매권이 나오기 전에는 신상품을 베끼지 못하도록 특허청에 특허를 낸 적도 있다”며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불편했다”고 말했다.

▽어떤 상품이 있나〓올 3월 ‘특허권’을 받은 미래에셋투신운용의 ‘시스템캡펀드’는 주식에 투자해 일정한 수익을 올리면 채권형으로 전환, 수익을 유지하는 펀드로 고객이 직접 주식과 채권의 투자비율을 선택할 수 있다.

삼성생명의 ‘리빙케어’ 보험은 건강보험과 종신보험을 결합시킨 것. 암 뇌중풍 등 치명적 질병을 진단받으면 사망보험금의 50%를 우선 지급해 치료에 쓸 수 있도록 했다. 3개월 동안 신규계약 건수가 2만840건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은행의 ‘따따따론 플라자’는 은행에서 대출받지 못하는 고객을 저축은행에 연결시켜 주는 것. 국내 최초로 은행과 저축은행이 연계된 상품이다. 금리는 연 12.5∼13.5%로 다소 높지만 인터넷을 통해 즉시 대출받을 수 있는 등 편리하다.

외환은행의 ‘주문형 환율예약’은 인터넷 등으로 자신이 거래하고 싶은 환율을 예약해 놓으면 시장환율과 일치할 때 자동적으로 계약이 체결된다. 예컨대 3개월 이내에 원-달러 환율이 1100원일 때 1000달러를 사겠다고 신청해 놓으면 시장환율이 1100원이 될 때 계약이 체결된다.

▽정착까지는 아직 먼 길〓그러나 ‘신상품 배타적 우선판매권’이 금융업계의 관행을 뿌리뽑고 신상품 개발에 불을 당기지는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도입기간(8개월)에 비하면 실적(16개)이 초라하다는 것. 그나마 특허권을 받은 아이디어가 상품으로 이어진 경우는 8건에 불과하다.

한누리투자증권 기업금융팀 허성모 부장은 “개발기간에 비해 보호기간이 절대적으로 짧다”고 말했다. 8개월을 들여 ‘상장차익공유 유동화사채’를 개발, 독점 판매기간을 7개월 요청했지만 심사 결과 3개월만 인정받았다.

이 정도 기간으로는 어렵게 금융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우선판매권을 받는 상품이 너무 ‘이상적(理想的)’이어서 일반 고객의 욕구를 앞서가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가 있다는 것.

일관성 없는 금융기관의 자세도 문제다. 개발 당시와 시장상황이 달라지면 상품으로 내놓기를 포기하기 때문.

삼성투신운용은 올 1월 ‘실버 베스트 펀드’로 우선판매권을 받았지만 개발 당시와 달리 주식시장이 크게 오르자 상품을 팔지 않았다. 주식형 상품을 적극 팔아야 할 시점에 힘을 분산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배타적 우선판매권을 가지 금융 신상품
구분회사상품부여일보호기간내용
은행우리따따따론 플라자1.152개월저축은행 등 2금융권과의 제휴로 은행대출이 안되는 신용등급 고객에게 대출
M&S통장7.24기업의 본사와 자회사의 계좌가 즉시 연동되는 통장
외환주문형 환율예약고객이 인터넷 등으로 거래를 원하는 환율을 제시하면 시장환율이 이와 맞을 때 외환매매가 자동으로 체결
증권한누리상장차익공유 유동화 사채5.233개월벤처캐피털사가 가진 비상장·비등록 회사의 주식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
투신미래에셋시스템캡펀드3.7주식에 투자하다가 일정한 수익을 올리면 채권형으로 전환
한국자녀미래설계장기채권투자신탁4.31개월10년 동안 적립해 자녀의 교육비 결혼자금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탬스델타플러스안정형펀드9.62개월주가가 크게 오를 때뿐 아니라 크게 내릴 때도 고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
보험삼성생명리빙케어6.73개월치명적 질병으로 진단되면 사망보험금의 절반을 지급
자료: 각 금융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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