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승헌/태풍이 덮칠때 국회는…

  • 입력 2002년 9월 1일 18시 56분


지난달 31일 오전 6시. 태풍 ‘루사’가 한반도에 상륙할 무렵, 서울 용산구 한남동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 공관에는 정균환(鄭均桓) 원내총무, 유용태(劉容泰) 사무총장 등 민주당 의원 19명이 들이닥쳤다. 이날 오후 2시35분이 시한인 김정길(金正吉) 법무부 장관 해임건의안의 국회 표결을 막기 위한 ‘의장 저지조(組)’였다.

정 총무는 “국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왔다”는 말로 의장의 등원을 막는 이유를 대신했다. 이어 오전 8시반경에는 임인배(林仁培) 수석부총무 등 한나라당 ‘의장 모시기조’ 의원 10명도 공관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오전 10시경 민주당 60여명, 한나라당 20여명 등 모두 80여명으로 불어난 의원들은 본격적인 설전을 시작했다. 양쪽의 명분은 모두 ‘국민’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나라당의 일당독재를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한나라당은 “편파적인 병풍 수사를 부추기는 행위를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전국 각지의 태풍 피해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는 데도 공관 접견실에서 박 의장을 둘러싸고 있던 양당 의원들은 입씨름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낮 12시25분경 한나라당 ‘모시기조’가 먼저 철수하자 남아있던 민주당 의원들은 박 의장과 함께 배달된 점심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의원들은 태풍피해에 생각이 미친 듯 했다. 한 민주당 당직자는 방송사의 정오 뉴스 20분 중 17분이 태풍 소식이었고, 의장출근 저지를 둘러싼 대치상황은 1분 정도만 보도됐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그나마 (국회의 추한 모습이 조금만 보도돼) 다행 아니냐”며 멋쩍어했다.

오후 2시2분경, 민주당 ‘저지조’도 해산하자 ‘수재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쏟아붓는 빗줄기 속에 의장 공관은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국회에 집결한 양당 의원들은 각각 의총을 열어 서로 상대당의 ‘정략적 태도’를 원색적인 용어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이승헌 정치부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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