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일본]정치인들 “월드컵 미워”

  • 입력 2002년 6월 9일 23시 24분


한국에서 대선 전초전 성격을 띤 6·13 지방선거로 인해 월드컵과 정치가 맞물린 뉴스가 쏟아지고 있듯이 일본의 정치도 월드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4일 사이타마(埼玉)경기장에서 일본대표팀이 벨기에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일부 정치가들이 곳곳에서 후원회 파티를 열었던 것으로 드러나 구설수에 올랐다.

자민당내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橋本)파의 고사카 겐지(小坂憲次)중의원의원도 이날 도쿄의 한 호텔에서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는 “이런 날에 파티를 열게 돼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멋쩍어 했다. 고사카 의원도 “준비를 잘못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며 “오늘 와주신 분들의 얼굴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자민당 간사장은 “이렇게들 생각이 없어서야”라고 비난했다.

의원들이 비난을 각오하고 파티를 강행한 것은 후원회 파티에서 걷히는 ‘기부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괜찮겠지”하며 날을 잡았는데 이제 와서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연기할 수는 없었던 것.

반면에 이날 오후 ‘월드컵추진 국회의원연맹’소속 의원 80여명은 두 대의 대형버스에 나눠타고 사이타마 경기장으로 가 일본팀을 응원했다. 이날도 정기국회는 개회중이었으나 여야의 대립으로 공전중이었다. 어찌보면 별로 문제되지 않을 이 일에도 찬반양론이 쏟아졌다. “당연하다”는 반응과 함께 “의원들의 긴장감이 풀어졌다”는 비난도 나왔다.

4일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 때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참석해 응원하는 모습이 중계되자 같은 날에 있었던 일본과 벨기에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중간에 참석한 것을 비난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 같으면 이는 비난받을 일이 못된다. 이날 시합은 황태자 부부가 벨기에 황태자 부부와 함께 관전했고, 황족이 참석하는 곳에는 가능하면 총리는 가지 않는 것이 일본 정치의 관례여서 중간에라도 간 것은 일본팀에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이 그치지 않은 것은 일본 정치에 대한 높은 불신감 때문이다. 일본 정계엔 요즘 의원들의 잇단 오직사건과 방위청의 민간인 뒷조사 사건,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의 ‘핵보유가능’ 발언 파문, 중국 선양(瀋陽)총영사관의 탈북 주민 박대사건 등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결국 월드컵을 즐기거나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정치인과 관료들이 스스로 망쳐버린 셈이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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