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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5월 20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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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을 뒤흔드는 김대중 대통령 3남 홍걸씨의 비리를 기획하고 주선한 최규선씨라는 인물이 바로 그의 ‘특별보좌관’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때 청와대 입성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사직동팀의 추적에 쫓겨 미국으로 나갔던 인물이 1년반 만에 귀국해 권씨 밑으로 들어가 권씨의 특별보좌관이라는 명함을 돌렸다.
▼공천권-공기업 인사 좌지우지▼
최씨는 이 정부 출범 초기인 98년 모 기업의 전용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는가 하면 청와대를 팔아 기업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러나 청와대 친인척 비리 내사를 담당하던 사직동팀이 집요하게 밀착 감시를 하고 정보기관이 합세해 ‘골인’(구속수감)시키려고 하자 98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1년6개월 만인 2000년 6월 입국한 최씨에게 권씨는 더없이 안전한 핵우산이 돼주었다. 그를 괴롭히던 사직동팀은 옷로비의 후유증으로 해체됐고 희대의 합작사업 파트너 김희완씨(전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권씨 캠프에서 만나 알게 됐다.
권씨가 2000년 4·13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정치판에 기웃거리는 사람이면 다 안다. 그 뿐인가. 김 대통령을 20, 30년 따라다니며 고생한 동지들을 공기업 사장 감사 이사로 내려보내는 낙하산 인사를 거의 좌지우지했다. 논공행상에 법률이 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사 대상도 아니었다.
권력은 인사와 돈에서 나온다. 국회의원 공천권과 공기업 인사권을 주무르고 각종 선거와 당내 경선 출마자들에게 다만 얼마씩이라도 도와주는 힘을 가진 그의 사무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언젠가 권씨의 사무실을 방문했던 한 지인은 권씨가 복도에 늘어서 있는 민원인들을 만나기 싫어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두더라는 말을 했다.
권씨는 99년 9월 김 대통령과의 40년 인연을 술회한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는 저서를 냈다. 작년 11월 일본 다치나마 출판사에서 나온 일본어판에는 ‘No.2의 삶’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일본어판의 소제목이 더 그럴 듯하다. 그는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버팀목이라기보다는 2인자였다.
홍걸씨는 국내에 들어오면 늘 최규선씨와 붙어다녔다. 이러한 동정이 국가정보원에 붙잡혔고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과 김은성 2차장이 최씨와 홍걸씨의 위험한 관계에 대해 보고를 했다. 임 원장과 김 차장은 이희호 여사로부터 “알려줘 고맙다”는 치사를 듣기도 했다.
이 여사는 이 무렵 주변 사람들에게 “홍일이와 홍업이는 내가 낳지 않은 자식이라도 말이 통하는데 홍걸이는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한탄을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최씨는 이러한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홍걸씨에게 접근했지만 사직동팀의 추적을 받던 이 정부 초기와는 달리 핵우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정보기관들도 조심스러웠다.
국정원의 청와대 보고 후 권씨는 김 대통령으로부터 불려 들어가 홍걸씨와 최씨의 사이를 떼어놓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대통령의 당부를 기민하고 철저하게 이행한 흔적은 없다. 고령의 김 대통령은 과거처럼 지시 이행 여부를 챙기던 꼼꼼함이 젊은 시절에 비해 현저하게 느슨해졌다고 한다. 최씨는 거꾸로 홍걸씨에게 연락해 국정원의 손발을 묶어놓으려는 시도를 했다.
▼정보기관도 손못대는 사람들▼
최씨와 김씨는 김 대통령이나 권씨의 20년, 30년 동지가 아니다. 김씨는 국민회의 자민련 한나라당을 전전하다가 권씨 밑에 새 둥지를 튼 사람이다. 최씨도 미국 커넥션을 무기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에도 줄을 댔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는 1차 대면까지 했다. 권씨가 이 두 사람이 홍걸씨를 끌어들여 수상한 사업을 벌이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고 하더라도 결코 책임이 작다고 할 수 없다.
No.2맨의 특별보좌관이 온 나라를 흔들어 놓고 있다. 김은성 국정원 전 차장이 권씨가 5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아 권씨를 골인시킨 배경도 궁금하다. 권씨는 지금도 구치소에서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이 한없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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