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서적에 화병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목이 뻣뻣하거나 명치끝이 답답하고 두통 불면증 등 증상만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서는 서양의학에서도 화병 연구가 시작됐다. 의사들은 화병을 ‘장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이를 풀지 못해 폭발하는 병’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에선 화가 원한으로 증폭될 때 생기는 증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직장마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시퍼렇던 외환위기 때 화병 환자가 줄을 이었다. 아예 화병클리닉을 개설한 병원도 있다.
▷화병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정신의학회는 7년 전 화병을 ‘한국인에게 주로 나타나는 분노증후군’으로 공식 인정했다. 영어에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던지 병명도 우리말을 그대로 옮긴 ‘Hwa-byung’이다. 왜 화병은 우리에게만 있는 걸까. 문화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는 이가 많다.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서양과 달리 우리는 절제를 미덕으로 삼기에 속으로만 삭이다 병이 난다는 것이다. 또 가부장적 사회, 한(恨)과 체념의 문화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남자보다 여자,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에게 많은 것은 그래서일 게다. 우리 국민 가운데 20%가 화병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옥중의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동교동계 좌장으로 한때 2인자 소리까지 들었던 터이니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만도 할 게다. 면회간 사람들에게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가 왜 화병까지 걸려야 했는지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나이 이미 일흔셋, 권력의 쓴맛 단맛을 모두 보았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달랠 여유가 아니겠는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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