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화병(火病)

  • 입력 2002년 5월 9일 18시 32분


우리말에는 유난히 ‘화’가 많이 들어간다. 화가 나서 못살겠다, 울화가 치민다…. 또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도 있다. 젊은이들이 잘 쓰는 “열 받는다”의 ‘열’도 화의 또 다른 표현이다. 화를 내는 자체가 정신건강에 좋지 않지만 풀어버리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꾹꾹 참고 가슴속에 담아두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경우다. 바로 화병(火病)이다. 냄비가 끓다가 어느 순간 뚜껑이 들리면서 국물이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태조 왕건’에서 말년의 궁예가 폭군으로 돌변한 게 화병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방서적에 화병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목이 뻣뻣하거나 명치끝이 답답하고 두통 불면증 등 증상만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서는 서양의학에서도 화병 연구가 시작됐다. 의사들은 화병을 ‘장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이를 풀지 못해 폭발하는 병’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에선 화가 원한으로 증폭될 때 생기는 증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직장마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시퍼렇던 외환위기 때 화병 환자가 줄을 이었다. 아예 화병클리닉을 개설한 병원도 있다.

▷화병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정신의학회는 7년 전 화병을 ‘한국인에게 주로 나타나는 분노증후군’으로 공식 인정했다. 영어에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던지 병명도 우리말을 그대로 옮긴 ‘Hwa-byung’이다. 왜 화병은 우리에게만 있는 걸까. 문화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는 이가 많다.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서양과 달리 우리는 절제를 미덕으로 삼기에 속으로만 삭이다 병이 난다는 것이다. 또 가부장적 사회, 한(恨)과 체념의 문화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남자보다 여자,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에게 많은 것은 그래서일 게다. 우리 국민 가운데 20%가 화병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옥중의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동교동계 좌장으로 한때 2인자 소리까지 들었던 터이니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만도 할 게다. 면회간 사람들에게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가 왜 화병까지 걸려야 했는지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나이 이미 일흔셋, 권력의 쓴맛 단맛을 모두 보았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달랠 여유가 아니겠는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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