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2년 4월 19일 17시 23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옛날 사람들이 이(理)와 기(氣), 체(體)와 용(用)으로 설명하던 세계와 오늘날 우리가 법칙과 물질, 본질과 현상으로 설명하는 세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근대의 우리는 존재 인식 이성과 같은 새로운 말을 통해 세계를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과연 이전과 얼마나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는가?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존재’라는 말이 130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 책의 서문을 시작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의 철학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철학 용어들이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중요한 문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치진, 신남철 등 1930년대의 초기 철학 연구자들이 사용한 용어를 검토하여 그것들이 대부분 19세기 후반기 이래 일본인 학자들의 번안 노력에 빚지고 있음을 밝혔다.
이 책은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본 현대 한국 철학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 용어들의 형성 배경 이외에, 1920∼30년대 이래 철학연구 경향을 분석하는 3부의 글들이 이 책에 실려있다.
1장에서는 초창기 철학 연구자들의 서양 철학 수용 양상과 주체성 중시의 연구 경향을 밝히고, 2장에서는 1970∼80년대 과학 또는 합리성에 대한 이해의 세 모형으로 실증주의 현상학 해석학의 대표적인 논의를 검토했다. 3장에서는 80년대 이후 근대 탈근대 등에 대한 논의를 몇몇 논자들을 중심으로 개관하고, 마지막 4장에 철학 용어의 형성 문제를 배치했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의 역사는 개념의 역사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 한국철학사를 몇 개의 핵심 개념으로 압축하여 단락짓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유효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용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의 현대 철학사가 전통과 근현대 사이의 격심한 문화적 단절 위에 구축된 것임을 감안할 때, 철학 용어의 유래를 추적하는 일 역시 철학사 전개의 전체적인 형세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책은 이런 의도와 기대에 비할 때 그 결과에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근대, 이성(혹은 과학), 주체가 책의 키워드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대 철학사를 꿰뚫는 문제나 그것의 판단을 위한 기준으로서, 동일 층차의 등가성을 갖는 개념들이라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달리 그 개념들 상호간의 연관성이 자세히 해명되지도 않는다.
‘근대’는 연구 대상들의 공유 공간이자 1980년대 연구 주제로서의 의미를 갖고, ‘이성’은 1980년대 이후 실증주의 현상학 해석학에 대한 반성의 기준이며, ‘주체’는 1930년대부터 해방 전후까지 초기의 연구 경향에서 도출된 결과물이다. 이것들은 충분한 연관 없이 각각 분할되어 있다는 인상이 짙다.
생각컨대, 각 시기의 핵심 개념들은 그것들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되며 전화한다. 개념의 역사를 구축하는 데는 개념의 이런 실제 과정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비판적 반성을 통해 시대를 대표하는 핵심 개념들은 상호 연결되고, 그것들의 배열은 비로소 개념들의 단순 집합을 넘어 개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960∼70년대의 연구자들이 현실 문제를 등한히 한 것을 두고 철학하는 것 자체가 근대화 작업의 일환이자 근대 비판을 함축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넘어간 부분은 저자의 연구 방법과 관련하여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대 철학사에 대한 조망이 통사로서의 철학사 또는 지성사의 맥락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은 서양에서 연원한, 이른바 서양 철학에 한정된다는 느낌이 다분하다. 이 점은 저자가 스스로의 논의 범위를 시대와 주제 면에서 일정하게 제한한 사실과 관계없이 관점과 지향의 측면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예를 들어 ‘존재’가 일본에서 1871년 고지유도(好樹堂)라는 일본인 학자의 ‘불화사전(佛和辭典’에 ‘tre’의 번역어로 처음 등장하고, 이노우에 데츠지로(井上哲次郞)의 ‘철학자휘(哲學字彙)’ 1881년 초간본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912년 판본에 다시 등장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1912년경에 쓰여진 이인재의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考辨)’부터 시작하여 1936년 한치진의 ‘최신철학개론’ 등으로 이어가며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서 ‘존재’가 ‘유(有)’나 ‘물(物)’ 등의 전통적인 용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에 대한 관심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점은 물론, 이노우에, 이인재, 한치진 등이 ‘존재’라는 용어에 담고 있는 개념 내용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여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수월한 일은 아니더라도 이런 작업이 가능해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현대 철학사는 통사로서의 한국 철학사 또는 지성사의 일부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초기의 서양 철학 연구자들이 왜 그것을 낯설어하지 않고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는지, 또 그들 가운데 다수가 어떻게 사회현실과 실천의 문제에 치중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좀더 치밀한 이론적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아쉬운 점은 책을 읽고나서, 저자가 여백으로 남겨놓은 자리에 메모한 평자의 독백과 같은 것이다.
혹시 저자 본인의 말대로 아직 시론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책이 우리의 철학 연구사에서 갖는 의의는 적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인의 글 읽기에 게으르고, 그것을 평하기에 더욱 각박한 현재의 학계 분위기를 볼 때 저자의 작업은 매우 값있는 일이다. 그의 작업은 현대의 시작으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인들의 철학적 탐구의 여정을 복원하고, 장차 우리 철학 연구자들로 하여금 자기 작업의 역사성을 자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최소한, 격동의 현대사에서 한국의 지성이 일 없이 놀고 먹지는 않았다는 점을 대중적으로 상기시켰다는 점에서라도 충분한 의의를 갖지 않을까 한다.
김문용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동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