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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4월 12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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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여 년간 우리는 돌진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개항이래 추진돼 온 근대화는 우리의 현실과 고민에 바탕을 둔 자생적인 근대화가 아니라, ‘위로부터’ 그리고 ‘밖으로부터’ 이식된 서구 베끼기에 불과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몸을 보호해 줄 수 없듯이, 현실에서 유리된 지식이나 제도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줄 수 없다.
현대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서구의 영향이 지대하지만, 법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한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적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구법의 이식이 이뤄졌고, IMF 사태이래 우리는 투명성과 효율성 제고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서구(미국)법의 이식을 강요받고 있다. 비록 법제도는 서구에 의해 이식됐으나 법문화와 법의식에는 전통의 영향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는 탓으로, ‘법’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괴리감을 느껴왔다.
현실에 맞는 사법 개혁과 법문화의 개선을 위해 전통의 법사상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통법은 강단에 선 극소수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게 됐고, 심지어 법과대학의 커리큘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전통은 하루아침에 단절되지 않는다. 전통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문화의 저변에 살아 숨쉬며 문화의 토양으로 작용한다.
수천 년 동안 우리네 삶의 준거가 돼 온 전통법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법문화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서구법의 외피 아래 잠복해 있는 우리 법문화의 실체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 책은 당나라 때 편찬된 ‘당률소의(唐律疏義)’의 총칙편을 현대 법학 개념으로 해설한 것이다. 당률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법체계에 대부분 그대로 수용됐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 전통법의 일반원칙에 대한 저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이미 6년여의 작업을 통해 ‘당률소의’(한국법제연구원)를 완역해서 출간했고, 이런 성과를 토대로 전통법의 일반원칙에 관한 완결판을 내놓은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전통법의 일반원칙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우리 법문화의 뿌리를 해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비상한 흥미를 유발한다. 그 한 예로 ‘당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범죄, 친족간의 범죄, 그리고 부부간의 범죄에 대한 처벌 원칙과 행위규범은 아직도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 한국 형법에서도 존속 상해·치사죄는 일반범죄보다 중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법 관념상 한층 흉악한 범죄로 인식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부당한 판결을 내린 법관을 처벌하고, 피해자에게는 반드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현대법에서는 판결의 독립성이 헌법으로 보장되고 있지만, 법관의 부당 판결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자의 권리 구제에 대해서도 보완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전통법에 규정된 부당 판결 피해자 구제 조항은 오늘날에도 참고할 만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농업사회를 규제하던 전통법을 현대 산업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통 법규범과 처벌원칙들은 우리의 법문화와 법의식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동양철학 kulee@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