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한민족 신바람 일으키는 잔치로…”

  • 입력 2002년 2월 19일 17시 07분



백기완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장 겸 통일문제연구소장(69)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겸 2002월드컵조직위원장(51).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18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만났다. 그 연결고리는 바로 ‘공차기(축구)’였다. 어린 시절 축구선수의 꿈이 좌절된 한을 간직한 백 소장과 현재 2002월드컵을 개최할 한국의 축구를 이끌고 있는 정 회장. 두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월드컵 개막 100일전을 맞아 축구를 화두로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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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사랑 한마음 신분도 초월

▽정몽준〓백 선생님은 제가 경험 못한 여러 분야에서 고초를 많이 겪으셨는데 그러면서도 축구에 대한 사랑은 강렬하면서도 순수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월드컵이 10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백기완〓제 경험에 따르면 축구는 한을 내지르는 거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가로막힌 한을 뚫고 나가 끝내는 한을 풀어주는 것이 축구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축구는 저 개인적으로 간들(운명) 같은 거예요. 좋다 싫다, 이런 논리가 아니라 축구하고 나하곤 간들, 즉 운명 같은 게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정〓흔히 월드컵이 우리나라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국제사회에서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모두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월드컵이 국민 화합, 나아가 인류 화합을 달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백〓저는 국제축구연맹(FIFA)가 한일공동개최로 한 것이 조금 못마땅한데요. 남북이 하나로 먼저 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축구는 예술입니다. 남의 나라를 괴롭히는 전쟁 따위는 반예술이거든요. 그런데 요즘 한반도에 무슨 전쟁 기운이 조작적으로 감도는 기분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공차기큰잔치’를 계기로 해서 전쟁 도발적인 일체의 발언이나 몸부림 같은 것을 청산하는 계기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지금 말씀하신 게 제일 중요한 얘기 중의 하나인데요. 지난해 9월 미국에서 테러사태가 난 이후 월드컵 안전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백〓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안전을 해치는 요인은 미리미리 차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공차기큰잔치에 위협을 주는 반안전적인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 어쩌고 하는 국제적인 기류입니다. 그것이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반안전 요인이요, 우리 공차기큰잔치를 괴롭히는 요인입니다.

▽정〓올 월드컵은 한국 일본 미국은 물론 중국이 참가하기 때문에 중요한 대회입니다. 금년이 한중수교 10주년입니다. 일본과 중국은 수교 30주년입니다. 이번 월드컵이 아시아에서 처음인 만큼 중국이 참가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축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중국이 포함되니까 아시아 전체의 축제로 가야 한다는 데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각국이 긴밀히 협조해 안전한 월드컵을 치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백〓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 공차기큰잔치를 평화스럽게 치르기 위해 우리 민족 내부에서 한번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을 모색해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휴전선에 있는 초소를 남쪽이건 북쪽이건 공차기큰잔치 동안만 없애자는 얘깁니다.

▽정〓좋은 말씀 같은데요. 그런데 초소를 없애자….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끼리 군사적으로 대치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바깥에 보여주자는 말씀 아니에요.

▽백〓맞습니다. 지금 남북이 대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이 아니죠. 군사적으로 아주 힘이 센 미국하고 분단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안전, 우리 민족의 목숨, 행복이 대립돼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공차기큰잔치 동안에는 초소 없애자, 뭘 총 들고 지키느냐 이 말입니다.

▽정〓좋은 말씀입니다. 황해도 구월산이 고향이시죠. 어렸을 때 축구선수 되는 게 일생의 소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축구를 사랑하는 분으로서 우리나라 축구에 관해 조언 좀 해주시죠. 백 선생님은 축구 응원단인 ‘붉은 악마’라는 이름의 대안을 ‘붉은 쇠뿔이’로 말씀하고 계신데요.

▽백〓잔치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바람입니다. 신바람은 겨드랑이에서 나오는 바람이고 발가락에서 나는 바람입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쾌지나 칭칭 나∼네’를 노래). 신바람은 일할 때 나오는 역동성입니다. 말뚝이 춤이라는 게 있죠. 훌쩍훌쩍 뛰는, 몸이나 발에 감겨있는 쇠사슬을 끊기 위해 끊임없이 놀고 있는 춤사위입니다. 그러나 그 춤엔 한계가 있습니다. 쇠사슬을 못 끊고 말뚝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죠. 말뚝을 끊고 나섰을 때, 자기 스스로 해방자가 됐을 때 신바람을 일으키는 말뚝을 쇠뿔이라고 합니다. 온몸에서 신바람이 나 운동장에서 응원하자는 겁니다.

▽정〓뜻이 깊군요. 요즘 고민 중의 하나가 이번 월드컵에서 어떻게 우리 전통예술을 잘 보여주는가 하는 겁니다.

▽백〓응원놀이를 세계적인 놀이로 재편성해보죠. 예를 들어 ‘빰빠밤∼’으로 시작되는 드보르자크의 ‘신천지’가 있는데 이는 미국 개척시대에 원주민들을 파괴해가면서 한 노래입니다. 그런걸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옹헤야∼’는 타작노래입니다. 콩이 여물었을 때 도리깨로 깨야 알맹이가 나오거든요. 껍질로 싸여 있는 위선을 깨 알맹이가 나오게 하자는 겁니다. 목숨을 나오게 하는 거죠. 경기장 안의 우리 동포들,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옹헤야를 같이 부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몽준 회장(오른쪽)과 백기완 소장이 축구박물관에 전시된 2002월드컵축구 공식볼인 피버노바를 들고 월드컵 성공 개최를 기원하고 있다.

▽정〓그런데 축구하고 위선을 깨는 것 하고 어떤 관련이 있나요.

▽백〓축구는 예술. 반예술은 전제입니다. 전제의 껍질을 깨는 거죠. 위선을 깨는 거죠.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깨자는 것입니다.

▽정〓껍질을 깨면 우리 선수들이 축구도 잘하게 될까요.

▽백〓시합장에 나가서 욕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자기를 놔야 합니다. 응원가가 또 하나 있는데요. ‘쾌지나 칭칭 나∼네’거든요. 쾌진이는 바위덩이, 칭칭이는 바위덩이에 눌려 있는 생명, 바위덩이 걷어차고 올라오는 새싹을 나네라고 합니다. 언땅을 깨고 일어나고 돌멩이를 쥐고 일어서라 이런 얘깁니다. 응원구호로는 ‘아리아리’를 생각해봤어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 올라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파이팅’보다 ‘아리 아리 아라리 아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슛은 ‘쌔려’, ‘때려’로 하고 골인은 ‘꽈이탕’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꽈이’는 과녁의 변형이죠. 경기장에서 ‘아리아리 쌔려 꽈이 꽈이탕’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말을 세계화하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모든 음이 경기 리듬하고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우리 국민끼리 더 좋은 이웃되게 하는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좋은 말씀 들려주십시오.

▽백〓걱정을 심도 있게 하시네요. 돈 버는 것도 좋고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자는 것도 좋은데요. 답답한 게 하나 있습니다. 공차기 큰잔치를 관객 위주로 자꾸 하려는데 우리 민족의 잔치로 하고 세계 60억 인구의 잔치로 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축구 잔치때 노점상 철거하려 하는데 그럴필요 없습니다. 이들도 물건 팔면서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이번 잔치를 통해 지방색 없애자 하는데 좋은 말씀입니다. 제안을 하나 하겠는데요. 남쪽 사는 동포 4000만명이 쌀 한 되씩 모아 가래떡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남북 7000만명이 가래떡 먹는 잔치를 벌이자는 건데 그것도 남습니다. 계산해보니까 쌀 4000만되로 가래떡 만들면 지구 몇 바퀴를 돌겠더라고요. 전 세계 배고픈 사람은 다 먹이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잔치를 만들자는 거죠.

▽정〓북한에 쌀을 주면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니까 반대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떡으로 주면 그런 문제도 없고 축제 분위기도 나고 아주 좋은 것 같은데요.

▽백〓또 하나 잔치하는 동안 양심수 다 내놓자 이겁니다. 우리만 잔치하면 됩니까. 이런걸 문제 제기하면 나도 옆에 가서 박수라도 치겠습니다.

▽정〓우리 정부에서는 양심수가 우리나라에 없다고 설명하거든요.

▽백〓거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네.(웃음)

▽정〓마음이 저희보다 더 젊으신 것 같은데 비결이 있습니까.

▽백〓내가 축구에 관심 가지는 건 축구의 철학적인 뜻이 우뚝 솟은 것도, 후미진 것도 다 발로 차버리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운동장에서 일등만 한다는 건 축구정신이 아닙니다. 그건 경기 정신이죠. 우뚝 선 곳도, 후미진 곳도 한번 발로 차서 편편한, 태평한 세월 만들자는 게 축구의 철학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 중에 늙은 젊은이가 많습니다. 자기만 배 좀 부르면 엉덩이 썩도록 땅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축구는 주저앉으면, 엉덩이 썩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예술입니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주저앉지 않습니다. 축구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고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진짜 축구선수는 공이 퉁퉁거리지 않아도 땅별(지구) 속에서의 숨결 소리를 듣습니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늙을 수 없습니다.

▽정〓우리 축구 선수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씀이 있습니까.

▽백〓우리 선수들이 해외에서 훈련경기 했는데 자꾸 져서 약올라 밥맛이 다 없어져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선수들이 선수로 나서는 거 같아요. 선수로 나서지 말고 춤꾼으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말에 ‘버들가지 물이 오르듯이 어깻짓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럽게 어깻짓하고 몸짓하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지만 그건 버들을 잘못 보는 겁니다. ‘버들가지가 바람을 몰고 가듯이 몸짓을 하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자유분방하게 자기를 다 놓고 우주를 몰고 가라, 자연을 몰고 가라는 뜻입니다. 우리 선수들은 운동장에 나가면 기량을 보여야 한다, 골을 넣어야 한다며 경직돼 있습니다.

▽정〓백 선생님은 평상시에도 저보다 축구에 관해 더 해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역시 그러네요. 제가 회장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웃음)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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